레드퀸 효과(RED QUEEN EFFECT) *
전인식(全仁植)
나 잡아봐라 나 잡아봐라
영양은 사자에게 달리기를 가르쳤다
사자는 영양에게 더 빨리 달리는 법을 가르쳤다
별이 빛나는 밤마다
따라잡기 위해,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서로는 서로에게 달리기를 가르쳐주고 배웠다
사자는 영양에게 지그재그 주법을
영양은 사자에게 매복과 기습전략을
달빛 부서지는 밤마다
온힘 다해 뛰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아름다운 사바나에 머물기 위해서는 두 배로 뛰어야한다
살기 위해 서로는 서로에게
달리기를 가르치고 달리기를 배운다
오늘도 우리는 건기 우기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뛰고 달려야 한다
너는 세렁게티 평원에서
나는 도시 기슭에서
주)레드퀸효과 :Matt riddly 저서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속편에서 나오는 레드퀸에서 비롯된 생물학 및 경영학 이론
웹진 『시인광장』 2018년 7월호 발표
1995년 선사문학상 시 당선. 1995년 신라문학 시부문 대상. 1996년 통일문학상공모 시부문 대상. 1997년 《대구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98년 불교문예 신인상 수상.
피그말리온의 일기 - 痛點 32/위승희
1
나는 한때 빵의 광신도였네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을 찬미하며
땀흘려 기도했네
원하는 쪽에서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궁시렁거리며,
2
배고픈 그믐밤,
나는 빵이 되지 않는 나를 버렸네
나는 무덤 속에 누웠네
달처럼 기우는 내 몸 안으로
지옥의 개들이 첨벙거리며
死者의 계곡을 건너는 소리가 들렸네
무언가 부시시 고개를 돌렸네
철없이 따버렸던 별들이 알을 밴 채
청동빛으로 죽어가고 있었네
3
무덤 속에서 나는 수의를 빨고 있네
간부처럼 낄낄거리며 흘러가는 거품, 거품, 거품들...
내 살갗에 보풀이 일어났네
보풀처럼 루시퍼의 목소리가 들려오네
'자, 먹어봐, 이건 정말이야, 달콤하다구'
내가 믿은 것은 정말 빵이었을까?
4
死者에게 빵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네
난 우울한 뼈마디를 세기 시작했네
아무래도 하나가 모자라네
나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버렸던 나, 내 사랑
그 빈 뼈의 자리에
죽은 별들의 애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네
내 육신에 생기가 돌고
무덤 안이 조금 밝아졌네
5
등 굽은 바람이 내 무덤을 쪼개고
부패 직전의 내 눈을 씻어주었네
별의 애벌레들 날개 달고 하늘로 솟구치네
루시퍼, 루시퍼,
그대는 나를 깜깜하게 꺼버릴 순 없으리
내게 빵을 속삭이던 달콤한 목소리여,
보이는가
저 깜깜한 하늘에 빛나는 별들, 여, 전, 히!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네
6
오늘의 무덤은 내일의 요람,
나는 부활을 믿는 자,
골고다 언덕, 내 사랑의 부활을 기다리는
피그말리온
- {시안} (2000/가을호)
석양증후군*/박미라
ㅡ개밥바라기별빛 환할 것이다
마음과 다리가 시차를 두고 출발한다
제각각 다른 문을 민다
저 다리와 마음이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나기는 할 것인가
같은 집으로 가기는 가는 것인가
손보다 입이 먼저 문을 미는 인체의 신비가 눈부시다
감나무 그림자가 두드리는 유리창 아래
백 년 동안의 사랑과
천 년 동안의 미움이
나란히 앉아서 별빛의 말씀을 오역誤譯하던
집으로 가야한다고
돌아가,
비루먹은 기억들에게 뜨신 밥을 먹여야 한다고
부르르 떠는 팔다리의 옛날을 꺼내줘야 한다고
별빛만으로도 창문 환해서
길도 물도 다 환해서
어쩌면 눈물까지 다 보일지도 모른다고
허기도 때가 있어서
제 살을 파먹다가 혼절하는 계절도 있다는데
어쩌자고, 모조리 닫힌 문뿐이어서
밀고 돌아서고, 밀고 돌아서고,
끝끝내, 알 수 없는 것들만 그득한 세상을
더듬더듬더듬더듬
저 아름다운 속도!
*치매환자가 석양이 진 후에 혼돈이 더해지는 현상을 이르는 의학용어로 '일몰 증후군(sundown phenomenon)'이라고도 한다.
웹진 『시인광장』 2017년 12월호 발표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안개부족』, 『우리 집에 왜 왔니?』 등과 수필집으로 『그리운 것은 곁에 있다』가 있음
호더스증후군/ 배정숙
돌지 않는 행성에서 바람은 허공을 다스리지 못한다
작년에 핀 안개꽃이 지금까지 자욱한 그곳은 불우함을 개의치 않는 나만의 제국
그 안의 꽃방이다
벽은 놀랍도록 견고해서 쓸모없는 오후가 가두어지고 낮달 꼬챙이 하나가 박혀서 빠지지 않는다
들어오지 못하는 달그림자는 소용이라는 단어와 오물이라는 아이러니 사이를 중재한다
나비가 묻혀온 꽃가루에서 쏟아지는 것은 모두 나의 당신
그리움의 커다란 무덤 속으로 빨려들어 가면 자동으로 출구가 닫히고
깨지지 않는 수정이 된다
구르지 않는 돌이 된다
녹지 않는 얼음이 된다
낯설지 않은 거짓말로 하수구를 막아놓고 몽환 속의 당신을 소장하는 가치에 나의 모두를 건다
그리고는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는 철통같은 나만의 우주를 만든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희고 따뜻하여 그곳에 영원의 무게를 묶어놓았을 때 안쪽의 광채는 다름 아닌 붉은 광기
향기가 풍기는 방향이 오리무중일 때 지켜야만 되는 약속을 위해 별자리 하나에 잔존殘存을 지탱한지라
유일하게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방식인지라
귀 기울일 수 없는 다른 유혹은 모두 불경스러운 울음소리인 것
빈 하늘을 두고서도 품으로만 파고드는 나이테처럼 다스려지지 않는 애물
이물스럽지 않은 최초의 분신이라서 비로소 나는 그것들의 심장 안에서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4월호 발표
2010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머지 시간의 윤곽』(시로여는세상, 2012)이 있음.
그래서 신데렐라는/ 양은숙
행복했을까
웨딩숍과 구두점을 두루 누리는
?
그녀가 빠진 건 왕자가 아니라 대장간 집 아들이었어
비참의 출구는 잠시잠깐, 분홍이었지
기록에 의하면 대장간 아들과의 사이도 어쩐지 불투명해
그러므로 잠시잠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여자와 낫 놓고 기역자 정도를 아는 사내가
복사꽃의 시절, 한 번 한 거지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세계는 섞이지도 못한 채
분홍의 시간이 깨지고 아궁이를 벗어날 출구는 무너지고
한 번 한 여자, 백마 탄 왕자라 해도 대장간 집 아들이라 해도
한 번 한 다음에는 수군수군 흉흉한 손가락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옛날 옛적
묶어둘 수 있다면 괜찮았지
다른 세계 다른 어떤 무엇이 될 수 있다면 괜찮았지
잠시 드리운 눈빛에 꼬여버린 인생
기록에 의하면 연분홍 사랑의 맹세는 그 어디에도 없어
누구나 한 번 쯤 연분은 있는 거고
어쩔 수 없이 툭, 끊어지는 연분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나 그래서 떨어져내렸나
흔들리는 절벽에서 나락으로, 바닥 모를 수렁으로
??
버려지고 구겨지고 또 버려지는 일회용
무표정한 야시장 뒷골목을 서성이며 바득바득 거리의 여자로 명줄을 이었네
돌아보기 싫은 서른이 지나서야 문득 돌아갈 집이 있음을 알았지
이승의 유일한 재산, 아버지의 집
어금니를 질근 깨문 신데렐라는 그때부터 전쟁을 선포했던가 아둔한 계모와 언니들을 상대로 모질고 억센 전쟁을 치렀던가 그 사이, 아버지 또한 죽음에 이르렀던가
그 비린 싸움으로 결국에는 게딱지같은 생가를 손에 넣었던가 그것이 생의 완성이었던가 그래서 신데렐라는 행복했던가 마침내 가족을 모두 추방해버린 그녀는 고독과 궁핍에 휘둘렸던가
적막의 계절을 비통으로 뒹굴던 그녀는 새 삶을 선포했네
밤마다 붉은 등을 거는 그 집
누구든 한 번 할 수 있었지
모두의 여자였지만 누구의 여자도 아니었어
무진장 매독을 앓고 무진장 매독을 옮기기에 바빴을 뿐
그 집의 기둥을 갉아먹던 흰개미들이 모든 걸 보았다지
???
삶은 더디게 썩고, 썩은 삶은 한꺼번에 인생을 허물지
이제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신데렐라
아궁이 옆의 식은 밥처럼 부스럼을 긁으며 넋을 잃고 있었네
견딜 수 없었지
재투성이 욥처럼 가려워서 넋이 나간 그녀는 창자까지 고름이 차올랐네
하지만 말기의 매독은 더 이상 옮겨지지 않아
그걸 아는 떠돌이 거지 하나가 그녀 옆에 앉아서
한번만 줘,
대답 대신 그녀가 중얼거린 이야기
바닥에서 바닥을 치며 억척으로 살아온 질긴 생에 은분금분을 묻히고
아름다운 수사로 가득 치장한 미모와 덕성이 깊은 또 다른 자아
신데렐라는 마법의 힘으로 신분상승에 성공한 처녀라 말했다지 처녀였다고 말이지
그래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 둘은 인간이 변할 수 있는 가장 어둡고 가련한 체위로 사흘밤 사흘낮을 지냈네
평생을 10밖에 모르는 여자와 69까지 아는 떠돌이 사내는 서로를 물끄러미 보았네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지요
깨알 같은 이율배반의 텍스트를 적어
거지보따리에 쑤셔 넣고 홀연히 떠나간 떠돌이는 얼어붙는 불후의 가슴으로 먹먹했다지
??
떠돌이가 떠난 뒤 다시 부뚜막의 식은 밥이 된 신데렐라는 생의 밑바닥에서
한 줄기 빛을 본 얼굴이었네
막장에 갇힌 사람은 지난날의 수치와 고통을 모두 삭제하려해 채색하려해
지난 생을 꿰매고 색칠해서 기억하려해
감당할 수 없는 상처는 역설과 반어로 윤색하지
이 또한 아이러니
온몸이 곪아들어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타고난 영혼의 빛깔
고름도 부스럼도 가려움도 아픔도 막장에는 단지 얼얼해
서까래까지 갉아먹던 흰개미들의 그 집의 재투성이 그녀는
곱사등이처럼 몸을 말고 부뚜막 앞에서 요절했다지
이상해, 사람들은 요절을 좋아해
뼈만 남은 시체가 헌 거적에 쌓여 언 땅에 묻힌 뒤
어쩐 일일까, 위선의 신데렐라 증후군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는 거짓말
그럴 듯한 거짓말
?
뭐 어때요
뭐가 그렇게 그래요
부들부들 세월의 가랑이 밑을 기어간 낙오자들, 헛된 희망 하나쯤
목숨 저 편에 초록색 패러독스로 걸어두는 게
뭐가 어때요
사람나무 가지에 옹이처럼 번지는
희망, 이란 어차피 오늘의 손에 쥘 수도 없는 걸
참담의 세월도 모르는 자들
바닥을 쳐보지도 않은 자들이 말하는 희망이 빈 깡통이지요
신기도 걷기도 힘든 유리구두
가뜬한 판타스틱 그 위선은 지금도 세상을 시시하게 누비는 망령이지만
그래서 신데렐라는
행복했을까, / 웹진 『시인광장』 2015년 7월
총량 불변의 법칙
안차애
감자 꽃이 피는 철에는 감자 순을 꺾어주어야 수확이 좋다. 꽃이 요요하고 성성해지는 시간, 새 순 내고 새 꽃망울 터뜨리느라 흙 속 감자 알 덜 여무는 것이다. 제일 말랑하고 어여쁜 꽃 순부터 꺾어낸다. 차마 바로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손 내밀어 여릿하고 달콤한 새 관계의 순을 툭 툭 잘라낸다.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언젠가 한 짓이었다.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너의 곁순을 몰래 꺾어냈다. 사랑이라는 당위로 네가 나의 속순 몇 개를 살짝 잘라냈다. 우주적인 그리움의 엔탈피를 맞추기 위해 우리의 가장 중심 순 하나가 꺾이어졌다. 꺾어낸 가지 끝에선 벌써 너 댓개의 새 순이 비명처럼 솟아올라 그리움의 총량은 맞추어 지고 있다.
계간 『문학과 창작』 2012년 봄호 발표
1960년 부산에서 출생. 부산교육대학 졸업. 200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불꽃나무 한 그루』(문학아카데미, 2003)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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