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령이詩발표♬/[♡] 계간문예지

제58호2015여름호/소시집

by 정령시인 2018. 8. 31.

 

 58호 목차1

소시집과 시작메모


소시집
정령

밤골 버스 안의 밤꽃 향기


덜커덩거리던 버스가 밤골에 선다.
밤꽃 향기 들이마시며 기지개 한 번 켠다. 
알사탕 문 아이가 
밤꽃잎 달랑달랑 떨어지는 길가에 쉬를 하다가,
버스가 덜덜덜 서두르자 
고추를 털다 말고 버스에 얼른 오른다.
밤톨 같은 아이의 콧물에서 밤꽃 향기가 난다.

아랫도리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밤꽃 몇 잎이 
훌훌 날아 옆자리 노인의 팔에 살짝 기댄다. 
노인이 지팡이를 콕콕 찍는다. 
버스 안은 밤꽃 향기로 가득하다. 
차창으로 밀려드는 바람이 밤꽃잎을 슬쩍슬쩍 건드린다.
밤꽃잎들 사르르 온몸 흔들며 꽃비로 흩날리다가,  
뒷자리 새댁의 치마폭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새댁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낙들이 피실피실 웃는다.
풀밭에서 있었던 꽃잠이야기 풀어진다. 
풀꽃들도 낯빛을 붉히더란다.




19금 소설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온다. 빨간색 스카프가 바람에 나부낀다. 그녀가 난간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운다. 그가 달려온다. 눈물을 닦아주며 웃는다.
가방을 든다. 기차가 선다. 밤꽃 흐드러지는 봄밤이다. 가뭇한 그림자가 들창에 다가선다. 너울너울 춤을 춘다. 두 그림자 달구경한다. 
풀이 누워 잔다. 꽃잎 하르르 진다. 그가 가방을 든다. 옷깃을 세우고 바람 속으로 들어간다. 바람이 거세진다. 그녀가 머리칼을 쓸어올린다.
눈이 온다. 눈밭에 눈사람 두 개 덩그렇다. 하얗게 쌓여가는 눈, 책을 덮는다.




주당 미스김


라디오를 켠다.
 
미스김을 찾습니다. 다소곳한 외모, 나긋나긋한 목소리, 업무 능력 최상인, 전날 회식 후 사라진, 미스김을 찾습니다. 
실장을 끌고 가 노래방 문고리에 넥타이로 묶어 놓고, 과장 항문에 과감하게 똥침을 날리고, 대리 양복 안주머니에 개불, 멍게 몰래 집어넣던, 활달하고 소탈하고 싹싹하고 능력 있는 그녀, 쪽팔릴 것 같긴 하지만 모른 척 할 것이니 부디 출근하십시오. 지나고 나면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신청곡은 변진섭의 돌아와 줘입니다. 잠시 후, 미스김 전화가 왔다네요. 아직도 왜 부킹 안 시켜주느냐, 주정 중이랍니다.

라디오를 끈다.
오늘은 나도 술이 마시고 싶어.






유리창에 내려, 
사락,
사락,
사그락,

입김 호호 불고 그림 그려. 
바람은 꽃을 피워. 
달은 눈 속에 잠겨. 
하얀 눈은 수북이 쌓여. 
아득한 나라 무릉도원이 창문으로 다가와. 

눈이 계속 내려.




시, 공주


장가들고 싶어 안달이 난 왕자가 있었대. 천지사방을 다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어 방을 붙였대. 공주를 찾아요. 글쎄 진짜공주를 가려내려고 완두콩 한 알을 스무 채의 요 밑에 숨겨두고 하룻밤을 재워 봤대. 예뻐도 똑똑해도 전부 가짜였대. 그 중 제일 거지꼴을 한 공주가 동글동글한 것이 밤새도록 배기고 멍들어서 잠 한숨 못 잤다 해서, 그녀가 진짜 공주라며 청혼했다는군. 배겨서 못 잤다. 진짜 공주 찾아 나선 왕자가 천지사방을 다 돌아다니다가 오늘 밤 나한테 오려나봐. 밤새 배겨서 뒤척거린 단어 하나, 그 놈의 시, 씨.




시작메모


시를 쓴다는 일은 마음을 덖는 일이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고, 머리를 가다듬는 일이고, 호흡을 가늘고 길게 조절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시를 쓰지 못한다. 어느 날은 마음이 아프고 어느 날은 머리가 무겁고 어느 날은 가슴이 뻥 뚫리는 슬픔에 시를 기억해낼 수 없이 온 몸이 무거워 그냥 잠을 청한다. 시는 그 자리에 서서 내가 써주기만을 기대하고 있는데 정령 나는 시작詩作을 못할 때가 많다.
컴퓨터가 물밀듯이 막 밀려오던 시절에 나도 남들처럼 컴퓨터를 구입하고 처음 첫 장면이 잊혀지질 않는다. 꽃, 나무, 구름도 없이 덜렁 잔디가 푸르른 벌판을 가로질러 티없이 맑은 하늘이 파랗던 사진이었다.
매일 컴퓨터를 켜고 끌 때마다 보이는 밋밋한 그 그림이 언젠가부터 구름이 생겨나고 꽃이 피어나고 나무들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색색이 고운 그림들이 무수하게 많아져 선별할 수 있고 만들 수 있고 가꾸게 되었다.
내가 시를 쓰는 작업도 그렇게 변해 갈 것이다. 하얀 도화지였다가 파스텔 톤이었다가 파랗고 빨갛고 알록달록 무지개 빛이었다가 새까맣게 칠할지도 모르고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누구는 변질되어가는 거라고 할 테고 누구는 발전되어가는 거라고 할 테고 누구는 신경도 안 쓸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은 시를 쓰는 일이었고 본질은 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가끔, 술을 부르고 잔을 따르고 노래를 마시고 몸을 흐느낀다. 한밤에 음주가무를 다 만나고 나면 밑바닥에 가려진 보풀같은 시의 씨앗이 솜털같이 나올 때가 있는 것처럼 나는 시를 기다리지 않고 늘 가까이 하려고 애쓴다. 누가 뭐라든 상관없이 시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시의 마음을 따라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마음으로 아무나의 가슴을 둥둥둥 울리는 그런 시를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