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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이詩발표♬/[♡] 계간문예지

제53호2014봄호/시추천

by 정령시인 2018.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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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홍수

 

몰랐었네. 비가 오면서 시나브로 개울을 덮고 논밭을 쓸고 댓돌을 넘을 때까지 그칠 거야 했었네. 못물이 차올라 있을 때는, 차마 그러리라는 것을. 물살에 휩쓸려 정처 없이 흘러가던 송아지의 애처로운 눈빛을, 가시연꽃 잎 떠다니는 혼탁한 못 속의 연보라빛 봉오리를 보고서야 알았네. 지게 한 짐 지고 건너오시던 아득한 선로 위, 눅진한 홍수 끝에 저리도 넓적한 등판으로 하늘 밑에 연잎 떡하니 벌어져 알았네. 장독 엎어지고 깨어지고 허물어졌어도 대추나무가지에 매달린 솥단지 내걸고 푹 퍼진 수제비 뜰 때, 켜켜이 연이파리 못 속에 앉아있는 걸 보고야 알았네. 흙탕물에 절은 방바닥 물 때 벗기고 푹 꺼진 마루 훔치던 후덥지근한 그 날의 태양, 발그레 붉어진 연꽃이었네. 책장에 촘촘히 꽂혀있다 물벼락 맞은 몸들 낱장 헐지 않도록 다림질하여 말리던, 한 여름의 연잎들이 책갈피 같은 연밥을 내주는 걸 보고야, 홍수였네. 연꽃 홍수. 푸른 잎 펼치고 유구한 세월을 안아 떠받치고 온, 중생들의 벅찬 환호성. 연꽃 물결, 홍수로 일렁거렸네.




밥상머리대왕 모집공고



다음과 같이 밥상머리대왕을 선출하오니 참고하시고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모집 일시는 모르 년 알게 월 될 일 조치 시부터, 간 년 위 월 대장 일 갑상선 시까지. 참가 자격은 온몸이 삐걱대는 아무나. 심사기준은 인생사십 면책수정 인생오십 혈압당뇨 인생육십 황혼이혼 인생칠십 자유선언 인생말년 무사안녕 인생종말 호호사망. 참가방법은 새파란 처녀들과 한나절 수다 떨고 우둔하고 우직한 청년들과 씨름 한 판 달달하고 알큰한 풋사내들과 탁주 한 사발에 알싸한 김치 한 쪽 찢어주던 곰살맞은 아낙네 살짝 시치미 뗄 때 오지고 까맣던 흑발 한 움큼 떠나는 그 순간. 접수마감은 건강검진 받는 날.





뇌구조 테스트




뇌가 생각하는 모습을 찍어댄다. 평균 무게만 천이백 그람이 넘고, 산소 결핍에 숨 막히지 않아도 되는, 뉴런이란 신경세포가 두개골을 감싸고, 뇌척수막에 쌓여 뇌척수액을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대뇌피질의 주름을 펴면 신문지 한 장 펼친 정도라는, 사람다움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중추기능하지 않으면서, 욕구 조절하는 시상하부가 명령하지 않는, 단기 기억을 장기로 저장하지 않아도 되는, 엄지손가락만 한 뇌간이 없어도 생각을 하고, 생명유지를 위한 연수가 활동하지 않아도 살아 숨 쉬는 뇌구조.

 

굵직한 대뇌에서 고작 한다는 일이 물음표 하나 던지고, 일말의 느낌표 같은 감성 찾는 일. 이름만 대면 스마트하게 날아온다. 하루 딱 한 번 허용되는 마케팅 전법으로, 휴대폰 접수만 가능하다. 깨알 같은 바램과 비대해진 열망이 포도송이처럼 영글다가, 빼곡하게 찰수록 허점이 드러나고, 텅 비어버린 두뇌가 말라붙은 언어로 찍힌다.

 

집 간판 올리고, 천문도사 글문도사 장군신 불러 모아 첨통 흔들며, 점치듯 점사를 받는구나.




별사탕 먹는 법


알사탕이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네.

그 밤 흔들리는 다닥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달콤한 입맞춤을 주워 함께 오물거리네.

 

사랑니에 비릿한 풀맛이 스미네.

흐려지는 불빛 따라 바다가 흐르고,

놀란 어금니가 와작, 응어리 오지게 깨트리네.

 

오톨도톨 밤별들이 와르르 쏟아지네.

입안으로, 목구멍으로, 가슴 언저리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간 꼭 그 자리에 스미네.

비릿하게 넘어가네.

너도 나도 넘어가네.




종이배




노아의 방주가 오랜 세월 종이로 탈바꿈 했겠다. 산을 깎고 아스팔트가 난 길 석조 울타리에 나앉은 걸 보았거든. 하늘이 까매지고 통곡하는 소리 격하게 들렸거든. 그럴 때가 있었거든. 온몸에 흐르던 핏줄기가 거꾸로 솟아 멈추지 않고 귓속에 선바람 소리만 쌩하니 지나고,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하던 세상이 무너지던 날, 모든 생명의 연장을 위해 단 하나의 짝들만 탈 수 있었던 안식처, 홍수를 이겨낸 후, 방주의 문을 활짝 열고 힘차게 내디딘 맨땅, 이 종이배도 그랬겠다. 조금씩 말라가며 또 다시 물 위에 뜰 그 날을 위해 당분간은 제 몸을 깎아 종이로라도 있어야 했겠다. 작은 개울에서 뜨는 연습을 하며 반가움에 눈물 조금 흘렸겠다. 아무도 그 심정 몰랐겠다. 오늘 이 배도 하늘이 무너지고 거센 비바람 몰아칠 때 통곡하며 짝지어 오던 그 기억, 오도카니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