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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이詩발표♬/[♡] 계간문예지

시와사람(2018가을)

by 정령시인 2018. 9. 29.

 

 

 

 

 

제5회 전국계간문예지작품상

정령

 

붉은 버지니아풍년화

치매입담·4

 

 

덜거덕덜거덕 오토바이가 으르렁대며 달려와 선다. 누룽지맛 사탕이 가슴에 안겨 부스럭거리며 떠든다. 당이 어쨌다고 그만 하라고, 북어포 너댓 봉지가 갈비뼈를 드러내고 가만 있으라며 웃어젖힌다. 속이 시원하네 암말 말어, 매운맛 컵라면이 빙 둘러 앉아 몸에 좋은 건 하나도 없다 투덜거린다. 고만해 다 내가 먹을 거라고, 털썩 앉은 불룩한 배에 고래를 태우고 당으로 꽉 찬 공기를 빨아 마시며 벌겋게 달아오른 혈압으로 버럭 내지른다. 하루벌이가 누룽지맛 사탕처럼 달달하다가, 북어포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다가, 다 불어 터진 면발처럼 뚝뚝 끊어진다. 불거진 볼에 심통이 가득 차서 벌떡거리며 고래를 걷어찬다. 그만해요 아버지, 버지니아풍년화가 마른 잎사귀로 살살 흔들어 말린다.

 

 

 

어쩌다

 

 

끈 떨어진 커튼이 펄럭인다.

열 받은 전깃줄에 새들이 비비거린다.

푸른 바람이 마르도록 울음소리가 탄다.

놀란 나뭇잎이 가로등을 깨운다.

적막과 밝음 사이에 어쩌다 와 있다.

 

시간이 오슬오슬 흘러간다.

빛의 그림자가 고양이가 되어 웅크리고 있다.

끈 떨어진 커튼이 문득 새를 바라본다.

전깃줄을 넘다가 바람이 새들을 건드린다.

태양의 비명이 낭자하다.

목젖이 타들어가고 가로등은 나뭇잎을 재운다.

어둠과 고요 사이에 어쩌다 와 있다.

 

 

 

 

신작)

그 개미들

지금그개미와 여기그개미와 아까그개미가 행군한다.

지금그개미는 이상한 살냄새를 맡고 대열을 이탈한다.

여기그개미도 슬그머니 대열을 빠져나온다.

살냄새가 나는 쪽으로 맹렬히 달린다.

아까그개미도 달려온다.

지금그개미는 너무 달린 나머지 뙤약볕에 널부러진다.

그 틈에 여기그개미와 아까그개미가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투실투실한 다리를 끌고 간다.

지금그개미는 망연자실 그 꼴을 지켜본다.

지금그개미는 아까 그 굵직한 다리가 야속하다.

아까그개미와 여기그개미는 이를 악물고 끌고 간다.

 

다리를 끌고 가는 아까그개미와 여기그개미가 부러운,

지금그개미는 간신히 발가락을 물고 죽을똥 살똥 애를 쓰는 지경이다.

아까그개미와 여기그개미는 신이 나 휘파람을 분다.

 

(개미왕국에서는 아까그개미와 여기그개미가 영웅이 되었다. 개미들이 떼로 몰려온다. 지금그개미는 발가락 사이에 숨어서 긴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개미들 사이에서는 여름이 길어서 여름 나기가 어렵다. 굵은 다리를 개미군단이 점령하면서 보이지 않는 전쟁이 치열하다. 여기저기 피가 터지고 살이 찢어진다. 서서히 굵은 다리가 모습을 드러내며 땅바닥을 딛고 선다. 다리에는 금방 지어놓은 개미움막이 퉁퉁 부어오른다. 개미들이 풍비박산 순식간에 흩어지고 발가락에 숨은 지금그개미만 살아남아서 기회를 엿본다. 해는 내리쬐는데 풀숲에서는 경계태세로 보도블록에서는 행군으로 군기가 바짝 든 지금그개미의 열기가 뙤약볕 아래 쨍쨍하게 올라온다.)

 

 

심사평)

사소함에서 건져올린'정서적 인식'의 힘

 

 

 

시작詩作이란 늘 진부해지려는 경향과 새로움의 압박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일지도 모른다. 작품의 안정을 취하려고 하면 진부한 느낌을 받게 되고, 무언가 새로운 시도에 골몰하게 되면 작품이 허술하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일종이 균형이 잠정저으로 필요한데, 정령시인이 바로 그런 시점에 접어들지 않았나, 개인적인 판단이 선다. 시인이었을 때의 발랄하고 산개散開한 시선이 비로소 한 중심으로 집중集中하고 있다고 보인다.

작품, [붉은, 버지니아풍년화]에는 '하루벌이'에 매인 그저 그런 '아버지'의 일상이 비유를 통해 병렬적으로 배치된다. '누룽지맛 사탕/당', '북어포/불편한 속', 컵라면/혈압'의 비유는 "하루벌이가 누룽지맛 사탕처럼 달달하다가,북어포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다가, 다 불어터진 면발처럼 뚝뚝 끊어진다."는 표현을 통해'하루'를 '일생'으로 확장하는 힘을 얻는다. 게다가 " 그만해요, 아버지."는 화자의 목소리이면서 '버지니아풍년화 마른잎'의 행위라는 점에서 저절로 강조된다. 풍년화 계열의 꽃이 노랑인데, 시인은 왜'붉은'이라 했을까, 그리고 산수유나 개나리처럼 익숙한 것이 아니라 하필 낯익었으면서 보편화되지 않은 '풍년화'일까, 등등이 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하게 된다. 시의 균형은 몸이 아니라 인식적 수고에서 비롯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한다.(장종권,백인덕(글))

 

 

 

자서>

 

 

바람의 고요가 귓바퀴를 간질이는 봄이다.

외로운 고요가 적막한 고요를 낳느라 한 낮이 다가도록

꽃잎이 물 달라는 소리도 초록 잎이 햇살을 조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기역이 니은을 부르고 디귿이 리을을 불러 조음을 주무르는 동안,

단어를 달래고 문장을 응시하는 중에는 일시적으로 순산을 한 것도 같았다.

글자들이 앵앵 울면서 떼를 쓰고 보채고 하는 어리광을 한동안 껴안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 품을 떠나 날아간다.

그동안 달래고 안아주느라 못 보아온 꽃들이 반갑다고 할테지.

연초록 빛을 쏘면서 잎들이 더 파래진 얼굴로 따갑게 째려 볼테지.

 

자판에서 글자들이 싱싱하게 다시 튀어오른다.

붉어진 태양은 벌써 동쪽에서 달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