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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Tv청주방송/당신의시/오후 한시의 파도 외9편

by 정령시인 2020. 1. 14.

 

내시가 실렸다.



정령

충북 단양 출생. 2014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
전국계간문예지작품상수상. 막비시동인. 부천문협회원.
시집 『연꽃홍수』, 『크크라는 갑』, 『자자, 나비야』.
badalove0@hanmail.net 010-7663-7324
14724 부천시 경인로 137번 나길 27, 705호


 




오후 한 시의 파도




오후 한 시의 고즈넉한 파도 위에 새들이 너울거린다.
은행나무에 걸린 파도가 졸릴 듯 말 듯 대화들이 노랗다.
보다 못한 까마귀의 찢어지는 고함소리 쪼까 문 여시오. 
은행나무에 걸린 파도가 화들짝 놀라 철썩철썩 문을 딴다.




시의 수적 논리




자음과 모음이 공중제비를 하는 시간은 미지수,  
곤두박질치며 구르고 굴러서 허방에 고인다.

허방에 고인 자음과 모음들이 떠나는 날은 자연수,
길을 가다가 차이고 책을 보다가 채이고 글을 쓰다 쓰러져
퇴비처럼 쌓이고 쌓여서 거름이 되어 뿌려진다.

거름이 되어 뿌려지는 자음과 모음들의 꿈꾸는 달은 함수,
그토록 기다려 다지고 다지다보면 행간 사이로 싹이 트고
무시로 구르고 차이면 다져진 글자들은 행간을 행군한다.

꿈의 조합으로 변하는 건 글자들이 시가 되는 날의 변수,
자음과 모음들이 수적 논리로 엮은 공식 위에 수시로 선다.




꽃무릇




철마다 연등 밝히던 손
가닥가닥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가
백팔번뇌 고개 수그리다 오뚝
마음 먼저 보시하려고 오뚝
합장하고 서니
오! 부처님! 관세음보살





연꽃 홍수




몰랐었네. 비가 오면서 시나브로 개울을 덮고 논밭을 쓸고 댓돌을 넘을 때까지 그칠 거야 했었네. 못물이 차올라 있을 때는, 차마 그러리라는 것을. 물살에 휩쓸려 정처 없이 흘러가던 송아지의 애처로운 눈빛을, 가시연꽃 잎 떠다니는 혼탁한 못 속의 연보라빛 봉오리를 보고서야 알았네. 지게 한 짐 지고 건너오시던 아득한 선로 위, 눅진한 홍수 끝에 저리도 넓적한 등판으로 하늘 밑에 연잎 떡하니 벌어져 알았네. 장독 엎어지고 깨어지고 허물어졌어도 대추나무가지에 매달린 솥단지 내걸고 푹 퍼진 수제비 뜰 때, 켜켜이 연이파리 못 속에 앉아있는 걸 보고야 알았네. 흙탕물에 절은 방바닥 물 때 벗기고 푹 꺼진 마루 훔치던 후덥지근한 그 날의 태양, 발그레 붉어진 연꽃이었네. 책장에 촘촘히 꽂혀있다 물벼락 맞은 몸들 낱장 헐지 않도록 다림질하여 말리던, 한 여름의 연잎들이 책갈피 같은 연밥을 내주는 걸 보고야, 홍수였네. 연꽃 홍수. 푸른 잎 펼치고 유구한 세월을 안아 떠받치고 온, 중생들의 벅찬 환호성. 연꽃 물결, 홍수로 일렁거렸네.





신 단군신화




너만 좋다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사람 손길 닿지 않은 비밀동굴을 찾아야지. 비밀동굴에 풀잎 따다가 푹신한 침상 만들고, 예전에 도망간 호랑이랑 곰도 불러서 짝짜꿍도 하고 늑대랑 여우도 불러서 칡넝쿨처럼 어울렁더울렁 맨살 비비며 뒹굴어봐야지. 날이 새면, 제일 먼저 옹달샘으로 찾아가 달 속에서 떡방아 찧던 토끼랑 계수나무 밑에서 자고 있던 토끼랑 꾀 많은 토끼하고 반가이 마주하고 물도 마시고, 청설모랑 다람쥐랑 도토리 까며 비석치기도 하다가,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베고 누워 나뭇가지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도 듣고, 밤이면 부엉이랑 올빼미도 노루랑 꿩이랑 깨워서 고무줄놀이도 하고, 풀벌레와 쫑알거리며 알까기도 하다가, 노란 달과 마주하고 주거니받거니 밤새도록 술 따르며 왕게임도 할 수 있다는데, 다시 마늘이랑 쑥 줄게. 너, 먹으러  올래 안 올래? 





몰래 쓰는 단양연가‧15
―돌담길 소꿉장난




돌담길에 작은 꽃들이
담장그늘에 앉아 소꿉놀이를 해요.
풀잎들은 놀고 싶어 안달이고요.
돌멩이는 부엌에도 앉고 방에도 앉지요.
풀밥 먹고 나면 흙밥이 앙탈도 부려요.
담장너머 대추나무아저씨도 넌지시 이파리를 흔들고요.
라일락아줌마도 새살거리며 꽃잎으로 참견을 해요.
지나던 하늬바람이 장단을 맞추며
천생연분이라고 소문을 내며 떠들어요.
제법 잘 어울린다고 해님이 빙그레 웃어요.
이냥 놀기만 했는걸요.





몰래 쓰는 단양연가‧16
―달쌉쏩쏘로로 시루섬




달의 모서리에 밧줄을 던지고 시루섬으로 가요.
달이 꼬리를 담그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당겨주면요.
작은 쪽배가 움직이는 대로 강물도 춤추고요.
실바람도 따라 덩실덩실 배를 타고 가요.
땃쥐 등줄쥐 멧밭쥐 두더지 너구리 족제비들이
수달 고라니를 불러서
흰목물떼새 붉은배새매 소쩍새들과 어울려
뽕을 따기로 소문난 곳인 걸요.
뽕밭에서 달쌉쏩쏘로로 외치면
죽어서도 함께 한다는 대요.
달이 꼬리를 감추기 전에 외쳐야 해요.
살금살금 다가가 달쌉쏩쏘로로.
오래오래 달쌉쏩쏘로로 달쌉쏩쏘로로.





백목련




상복 위에 투둑 하얀 목련이 피었다
겉저고리 밖으로 상주 대면할 때마다 피는 것을
옷섶에 뽀얀 젖무덤, 목련처럼 매무새가 열렸다

가는 길조차 목련 피우고 가는 저 야속한 사람
저 사람이 생전에 잇몸 하얗게 웃더니
삼년 병수발 목련처럼 웃으라며 피었다





봄맞이꽃
―치매입담·6




길가에 쪼그려 앉아 꽃이 좋다고 허리를 구부리는 어머니
조그만 꽃이 엉덩이에 깔리면 어쩔까 발에 밟히면 어쩔까
어째 이리 고울까 미워죽도록 너무 예쁘다고 삐죽거리며
작디작은 하얀 꽃들이 저보다 예뻐 보인다고 호들갑이다.

난리다. 벌이 날고 나비가 날고 어머니 눈동자도 따라 난다
벌들이 윙윙 춤을 추고 나비들도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작은 꽃들이 어머니의 환한 얼굴을 보고 헤죽헤죽 웃는다.

어머니 손가락 수 만큼인 꽃잎, 다섯을 못 세도 좋아
괜찮으니 옆에만 있어달라며 봄맞이꽃이 말갛게 웃는다.





봄이 오는 양평길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야. 두물머리 쌍바위골에는 노승 홀로 지키는 작은 절이 있었대. 그 분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목탁을 두드리고 불경을 외울 때마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꽃들이 하나씩 하나씩 벙그러지는 거야. 처마 밑 목어는 또 어떻고. 온몸으로 잦아드는 그 소리에 댕그렁댕그렁 장단도 맞추었다잖아. 오죽하면 스님이 탁발수행하던 길에도 한 겨울 앙상한 나무들이 사그락사그락 초록잎을 피워냈겠어. 그 뿐이 아냐. 그 스님이 면벽 참선할 때에는 얼었던 골짜기물이 좔좔좔 폭포수로 흘렀다지, 아마. 지금도 봐 봐, 얼마나 염불을 많이 외고 목탁을 두드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