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시인마을에 가득한 차향'에서 발췌
시(詩)의 ‘안과 밖’에 대한 어떤 사유(思惟) -지난호 다시 읽기 백인덕, 시인 최근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강연과 기고문들을 엮은 한 에세이에서 “타인을 적(適)으로 인식하는 순간 자신에게는 지옥이 열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싸르트르의 실존론을 오늘의 문화, 사회 상황에 맞게 한 단계 더 진전시킨 대담한 발언이라는 중평이다. 국내의 경우, 최근 몇 년의 사회문화적 키워드가 ‘다문화’ 또는 ‘화합, 조화’였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안과 밖’에 대하여 사유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라 기대했다. 물론 ‘시’ 또는 ‘시작’에 있어 ‘안과 밖’이 사회문화적 현상을 지적한 발언들을 그대로 유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작품의 의미를 안으로, 수사를 밖으로 갈라 지나치게 의미를 강조하는 태도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표면과 이면, 내포와 외연처럼 ‘안과 밖’을 지나치게 미세한 차원에 가두려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결국, 문제는 ‘안과 밖’에 대한 ‘사유’이고 그것이 형상화된 작품들, 더 들어가 그런 작품들이 사유하고 있는 안과 밖의 정체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 아라문학》 여름호에는 그런 고뇌의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다수 게재되어 있었다. 이 작품들을 중심으로 두서없는 시 읽기를 해 볼 요량이라. 1. 문학연구가 대체로 작고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고, 문학비평이 생존 작가에게 더 큰 비중을 두는 이유는 한 자연인으로서의 죽음이 시의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대상, 즉 작품이라는 텍스트의 변화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불변성은 역으로 해석의 가능성을 그만큼 열어준다. 평생 시를 썼지만 돈 된다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후배 시인은 집도 사고 생활도 꾸렸다 사양하지 못해 받은 원고료까지 셈하니 3개월치 월급 밖에 되지 못한 한 생애, 시를 살다 간다 투정도 하지 않고 한 줄에만 골몰하며 세상일 숙제하듯 내다보면서 평생 일천만 원 벌기 위해 수억 원 재능을 버린 나는 가족에게 시로 밥 한 끼 먹인 적 없다 시는 애써 외면할 수 있는 가난이었기에 이는 곧, 나다 외치고 싶지만 잘 가거라 끝내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은 나에게 빚만 남겨두고 떠나는 시여. -김종철, 「평생 너로 살다가」 전문 주지의 사실이지만, 한국시인협회 회장이셨던 김종철 시인께서 지난 초여름 소천하셨다. 선생은 공적으로는 내가 시협의 상임위원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대표자이셨고, 사적으로는 가장 친한 친구와 후배와 숙부님이 되신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의 특집을 《 아라문학》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반가웠다. 시인은 ‘평생 시를 썼지만“이라는 단서로 시작해 ’나/시‘의 운명이 뒤바뀌는 순간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다. 제목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시인은 평생 ’너(시)‘로 살다가 그 삶의 끝에서 ”끝내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는/나에게 빚만 남겨두고/떠나는 시“에게 ”잘 가거라“ 고별을 고하고 비로소 ’빚만 남은” 나, 즉 진정한 시인이 된다. 마치 오래전 김종삼 시인의 “시는 나의 직업”이라는 선언을 다시 듣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생활과 시, 추상적으로는 밥과 자유가 항상 갈등 속에서 안과 밖을 이루었던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김소월 부터였으니, 그 내력이 유구하다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안과 밖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서 또 하나의 명품을 만났다. 덮으면 감쪽같이 가려진다는, 따뜻하기로는 어머니 가슴도 대신할 수 있다는, 감긴다는 상상만으로 이야기하면 남자 품에 안기다가 유 두가 짜릿하게 날서기도 한다는 비밀이 숨어 있는, 솜이 틀어지고 풀 먹인 광목이 누벼지고 흘쳐지는 그 어둠 속에서 아궁이엔 장작불이 타고 굴뚝엔 저녁연기 모락모락, 구들장은 달아오르고. 매일 장작불 은 타오르고, 밥 짓는 연기는 모락모락, 해가 반짝 고개 들고 나오면 마당엔 배꽃이 피고, 복숭아꽃이 피고, 강아지가 새끼를 낳고, 코흘리 개 오줌싸개의 누런 지도가 마르고, 다듬이돌 위에서 또드닥또드닥, 지린내가 풀풀 나는 이불 위에서 아이가 자라고, 고추가 여물고, 어화 둥둥 알몸이 뒹굴고, 말리고 밟고 두드리고 다지고 덮고 감싸고 공들 여 쌓은 만리장성, 자자. 과거사의 실천론과 가려야할 것 제체두고 덮 어야할 것 포개어버리는, 비밀스런 성역들이 맨몸으로 활개치는 숲 속의 화원, 배꽃 밤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잘자 현대사의 이불기술론. 아무튼 펼쳐야 푼다. -정령, 「이불론」 전문 함께 수록된 다른 작품을 빌어 이해하자면, 정령 시인에게서 앞에서 거론한 ‘생활과 시작’에 대한 고민을 안과 밖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시어의 이중적 활용, 수사적 아이러니의 차용, 중심이 된 알레고리의 축 등을 통해 일반적으로 현대시가 기대하는 안과 밖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이불론>이라니, 대체로 -론이란 공적이며 전문적인 영역의 담론에 붙는 것이지, 일상의 미시사에 붙이기에는 좀 버거운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거대서사보다 미시사가 주목 받고 필요하다는 점을 시인이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표층적 서사는 기본적으로 ‘이불’의 탄생과 활용, 결과 등으로 짜여 져 있는데, 즉 이불에 대한 사유가 밖을 이루고 있는데, “잘자, 현대사의 이불기술론. 아무튼 펼쳐야 푼다”는 끝에 이르러 시적 서사의 안이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상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2. 우리는 가끔 의도하지 않은 착오, 즉 어이없는 오해 속에서 스스로의 편리와 안식을 구하게 된다.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 안이고 밖일까, 몸과 정신은 어디가 안이고 밖일까, 또는 정신의 내계와 외계의 자극 중 어느 것이 안의 역할을 하고 어느 것이 밖으로 향하게 하는가? 시적 사유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의문들은 나름의 가치를 이미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꽃잎 지고 새 순 돋을 즈음이면 봄비가 온다 그녀는 은박지 위로 흘러내리는 이슬방울 혹은 먼 소녀의 귀밑머리에 송송 돋은 복숭아털을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길 그래서 소리 없이 대지만 촉촉이 적시고 돌아가는 걸까 한참 예쁜 자태 뽐내는 꽃잎 건드리지 않으려 바람도 데불지 않고 혼자 슬쩍 다녀가는 봄비 올 여름 태풍을 준비하기 위해 지구 곳곳을 살피고 돌아가는 하늘의 순라꾼인지도 모른다 아! 이제 나도 고향집 몰래 다녀가는 나그네처럼 먼 길 떠날 채비 서둘러야 하는가. -강인섭, 「봄비」 전문 시인은 ‘봄비’라는 자연적 상관물을 통해 ‘인생’이라는 한 순환을 결코 충격적이거나 공포스럽지 않게 그려 보여준다. 마지막 연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봄비’를 일 년이라는 한 순환주기의 ‘나그네’로 비유함으로써 시인 자신을 인생이라는 주기의 또 다른 나그네로 변화시키고 있다. 결국 자연을 밖으로, 나를 안으로 출발한 사유인 듯싶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2연에 잘 표현되어 있듯이 ‘포섭(包攝)’의 정신이 드러남으로 인해 ‘자연/나’의 경계를 무화시키고 있다. 간밤 첫 서리에 퇴출된 낙엽들이 길가 배수구 위로 마구 떨어져 쌓인 간석오거리 다섯 마리 긴 뱀의 대가리가 한 곳에서 얽히고설킨 가운데 두 운전자가 네가 비키라며 차에서 내려 드잡이하고 있다 잔뜩 발기된 다른 독들은 사방에서 짖어대고 땡감처럼 딱딱해진 독기는 기어이 발목을 묶는 사슬이 되고 말았다 동시, 빈 내 조수석 쪽 차도 옆 보도에서는 아직 사슬을 모르는 어린 강아지 두 마리가 치킨 조각을 사이에 두고 재밌게 가댁질하고 있다 투명을 통과한 햇빛이 눈부신 평화 백신을 접종한 화사한 아침 놀이하듯 말랑말랑한 독을 물고 잽싸게 도망가던 놈이 휙 유턴을 하고, 뒤쫓던 놈은 잠시 딴전도 부리고, 다시 물고 물리다가 어느 놈인지 모를 목구멍으로 꿀꺽 골인되었다 어쩔 수 없이 임시 자동차 전용극장의 관객이 되어 멀뚱히 지켜보던 내 안의 딱딱한 독들도 주연보다 나은 천천한 조연들의 막간 연기로 시나브로 조금은 말랑해진 월요일 아침이다 -장재원, 「말랑말랑한 독」 전문 때로 ‘안과 밖’이란 내가 설정한 감옥이기 이전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더 거대한 사고와 행동의 족쇄, 굴레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때로 우리의 본질을 억압하는 문명, 사회, 도시와 같은 짧은 사유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여러 이름으로 나와 관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의 현대인은 오히려 찰나적 인식 속에서 그러한 억압과 굴레가 파탈되는 한 순간, 작은 틈을 발견하는데 열중한다. 장재원 시인의 작품은 이런 저간의 사정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내 차 안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밖은 온통 ‘잔뜩 발기된 다른 독’들이 사방에서 울부짖는 형국일 뿐이다. 그 끔직한 월요일의 교통정체 속에서 시인의 눈은 ‘말랑말랑한 독’을 향하는데 그것은 아직 사슬을 모르는 강아지 두 마리가 벌이는 ‘가댁질’이다. 이 작품은 ‘드잡이/가댁질’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이익과 편리라는 먹이를 놓고 자행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시작에서의 안과 밖에 대한 사유란 결국 시적 태도로 귀결한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시인, 즉 생활인의 모습을 지워버렸을 때 드러나는 얼굴이다. 혹은 역으로 생각한다면 일상적 자아에 시적 자아라는 화장을 한 겹 덧발랐을 때 형상화되는 얼굴, 그 얼굴이 짓는 미묘한 표정과 표정의 언어들이다. 안개가 짙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안개의 몸피를 더듬어 가늠하고 손가락 발가락의 수를 세어보아 야 한다. 안개의 표정은 맑은가 어두운가, 입술은 여태껏 앙다문 채 인가 배시시 열리는 중인가, 안개의 속살은 두꺼운가 부드러운가 또 얼마나 깊은가 음습한가 헤아려보아야 한다. 안개의 속살 사이에 들 어앉은 나무와 풀과 집과 그 안의 숨결들, 웃음들, 빈 들판의 눈물들, 쉼 없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한숨들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 다.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온몸을 떨어야 한다.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 뒤따라 날아오르는 새 떼들의 날갯짓 따위는 잠시, 어쩌면 오래도록 잊어야 한다. 바야흐로 때는 안개가 짙을 때, 어김없이 안개가 짙고, 지금 우리 는 오직 이 안개에 집중해야만 한다. -남태식, 「집중」 전문 시인은 명확한 선언으로 작품의 앞뒤를 일관한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때 이 작품의 해석의 열쇠는 당연히 ‘안개’의 상징적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변한다. 작품의 나머지 부분들은 다 이에 대한 시적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몸체를 확인하고, 표정을 살피고, 입술과 속살을 만져 보고,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다”고 한다. 이 작품은 남태식의 시작법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안개’를 ‘시어’로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독자가 다르게 읽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세상으로 나 있는 길을 잃어버리고 책 속으로 나 있는 길을 걷다보니 아주 고요한 곳에 오게 되었다. 이곳에 머물러야겠다, 한 생애가 지나가는 동안 잉크 정원을 갖고 싶은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그 꿈을 몇 번의 생애가 지나가는 동안 잊지 않고 새로 태어날 때마다 첫 번째 일기장에 적곤 하였다. 잉크로 그려 넣은 나무에 잎이 돋고 새가 와서 날아와 앉는다. -유경희, 「잉크 정원」 전문 유경희 시인은 일반적으로 시인들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소박한, 그러면서 가장 본질적인 꿈을 <잉크 정원>이라는 상상의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잉크로 그려 넣은 나무에 잎이 돋고 새가 와서” 앉는 꿈은 시, 아니 나아가 모든 예술이 바라는 궁극의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를 시인은 ‘세상에 나 있는 길’을 잃었다/‘책 속으로 나 있는 길’을 걸었다 는 명확한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그 결과 ‘잉크 정원’을 갖고 싶은 ‘아이’라는 작고 여리고 순수한 어휘 계열로 작품을 형성했지만, 그 안, 다시말해 작품을 통해 바라는 시인의 꿈은 그만큼 원대해졌다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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