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에 대하여) 말더듬이 멱서리에서 한국문학의 대작가로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운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 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 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 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을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 쓰기(필승前. 3.18)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양력)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의 모습 또한 깊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있는 한 잊히지 않을 것이다. 만무방이 살았던 농촌과 김유정 김유정이 살았던 농촌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 초기부터 1910년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 [산미증식계획]의 명목으로 침략전쟁의 뒷바라지와 차질 없는 식량공급을 강요해왔다. 1920년 경제공항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본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등으로 침략전쟁을 확대시켜 한국을 더욱 강압적으로 약탈하고 상품시장으로 만들었다. 당시의 농촌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지주와 마름, 그리고 소작농민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번이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치고 그리고 생김 생기길 호박개 같애야 쓰는 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 됐다. 작인이 닭마리라 좀 보내지 않는 다든가 애벌논 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낙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이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치든 놈이 그 땅을 슬쩍 돌아안는다. 이 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 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동리사람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신굽신 하는 게 아닌가 ” -「봄·봄」 중에서, 김유정 전집. 1987- 소설 「봄·봄」에는 읍내 사는 배참봉댁 마름인 봉필영감이 등장한다. 그리고 「봄·봄」과 「동백꽃」 이 외에 작품에서도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가 드러난다. 지주는 토지 소유자로 농지가 없는 소작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마름을 시켜 소작 농민을 감독하고, 소작료를 징수했다. 그런 과정에서 마름은 소작농민을 노예처럼 함부로 다루었고, 지주와는 별개로 수탈을 하기도 했다. 당시 지주는 수리조합비·비료대 등의 각종 부담까지 소작농민에게 전가하여 80%의 소작료를 수탈하였다. 소작료 이외에 노력봉사·경조사 비용 등 각종 명목을 소작농민에게 부담시켰다. 소작농민은 지주에게 신분적,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명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관념적 피상적 농촌소설과 달리 김유정은 실감나는 농촌소설을 썼다. 그것은 체험과 관계가 깊다. 그는 서민적인 것을 좋아했다. 또 소박하면서도 황소고집이었다. 그것은 산골에서 직접 살며 농촌 분위기를 가까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정시대의 가난한 농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영원한 산골나그네 1930년대가 평론가 안함광과 백철에 의해 재기된 한국 농민문학이 농촌 혹은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광수의 「흙」, 이기영의 「고향」, 한설야의 「탑」, 김남천의 「생일전날」, 심훈의 「상록수」, 이무영의 「흙의 노예」와 「제1과 제1장」, 김동리의 「산화」, 현덕의 「남생이」, 박영준의 「모범 경작생」과 「목화씨 뿌릴 때」 그리고 김유정의 「동백꽃」과 고향을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수, 심훈, 이무영 등의 작품이 일제의 식민지 농촌의 수탈현상이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그 속성으로 안고 있는 취약성, 또는 한국농업이 처해있는 역사적 생산 조건 따위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으므로, 많은 문학적 결함과 이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농촌에서 소재를 찾는 일종의 소재주의 위험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김유정의 문학은 이런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일정한 문학적 성과를 일구어 냈다. 당대의 농촌을 모르고서 한국의 사회현실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또 그 현실에서 태어난 문학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김유정의 문학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농민의 고단한 삶이 작품 속에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감싸는 웃음, 해학 해학은 작품 속의 만무방과 따라지들 같은 주인공들 보다 독자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순간 터진다. 독자는 자신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를 내려다보며 마음껏 웃는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 왠지 모를 비애와 동정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유정의 작품은 우리 전통 마당극이나 탈춤, 판소리 등에서 만나는 어조와 해학적인 웃음처럼 우스운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대상의 결함과 비리를 드러낸다. 그러나 풍자극이 대상과 대립하여 비꼬는 방법을 쓰는 반면에, 김유정의 해학은 이런 맥을 같이 하면서도 대상을 한층 넓고 깊게 통찰하면서 동정적으로 감싸 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김유정의 재능은 감칠맛 나는 속어, 비어와 눙치는 어법으로 당시 농촌의 만무방과 도시 따라지들의 슬픈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판소리처럼 들려주는 데 있다. 만무방과 따라지, 그리고 들병이들이 어우러진 강원도 아리랑 유난히김유정의 작품에는 아리랑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아리랑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 가게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봉 팔만 구암자, 재재 봉봉에 아들딸 날라구 백일기도두 말게구 타관 객지 나선 손님을 괄세두 마라 논밭전토 쓸만한 건 기름방울이 두둥실 게집에 쓸만한 건 적조간만 간다네 아주까리 동백아 흐내지 마라 산골 큰 애기 떼난봉 난다 네가두 날만치나 생각을 한다면 거리거리 노중에 열녀비가 슨다 네팔자나 내팔자나 잘먹구 잘입구 소라반자 미닫이 각장장판 샛별같은 놋요강 원앙금침 잣모베개에 깔구덮구 잠자기는 삶은 개다리 뒤틀리듯 뒤틀렸으니 웅틀붕틀 멍석자리에 깊은 정이나 들이세 -수필 「강원도 여성」 중에서- 소설 「만무방」의 응칠이 입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상황, 즉 소작마저도 어려워 빚만 늘어나 야반도주를 하고, 수수 일곱 되에 같은 농민끼리 살인도 마다 않는 모습과 소설 「안해」에서는 아내를 들병이로 내보내려는 따라지와 만무방들의 모습을 애절하고 처절하게 보여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증긔차는 가자고 왼고동 트는데 정든님 품안고 낙누낙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낼갈지 모래갈지 내모르는데 옥씨기 강낭이는 심어뭐하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 소설 「만무방」 중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춘천아 봉의산아 잘있거라 신연강 배타면 하직이라...... - 소설 「안해」 중에서- 팔라당 팔라당 수갑사 댕기 곤때도 안묻어 쥔애비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가게 시에미 죽어선 춤추드니 방아를 찔적엔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가게 - 수필 「문인끽연실」, 중앙, 1936.2에서- 입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 백설이 흩날려도 아니오시네 잘살고 못살긴 내복분이요 하이칼라 서방님만 아더주게유 입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 백설이 흩날려도 아니오시네 - 수필 「닙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 중에서- 도란도란 열여섯 마당 <실레이야기길> 금병산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옴폭한 떡시루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실레(증리)는 작가 김유정의 고향이며 마을 전체가 작품의 무대로서 지금도 점순이 등 소설 12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금병산 자락의 실레이야기길은 멀리서 문학기행을 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 <근식이가 자기집 솥 훔치던 한숨길>, <금병의숙 느티나무길>,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 등 재미난 이야기 열여섯 마당과 만날 수 있는 실레이야기길은 1시간에서 1시간 반까지의 코스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01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 들병이(들병장수): 병에다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 김유정 소설에는 19살 들병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남편과 함께 인제나 홍천에서 이 산길을 통해 마을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야기가 많이 그려졌다. - 관련작품 :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안해, 소낙비 02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금병산 자락 장수골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겨드랑에 날개가 달린 아이를 낳자 이런 장수 아이가 태어나면 좋지 않다고 마을 사람들이 아이의 날개를 잘라버리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 함께 태어난 용마도 아이가 죽자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 - 관련작품 : 두포전 03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소설 「동백꽃」과 「유정의 사랑」의 작품 배경이며 문화 휴식처인 잣나무 숲이 있는 산지기 시인 김희목이 가꾸는 과일밭. - 관련작품 : 동백꽃(김유정), 유정의 사랑(전상국), 산국농장 이야기(김희목) 04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봄에 산수유가 필 때 나무에 잎이 나기도 전에 노랗게 피는 생강나무꽃이 김유정 소설의 <동백꽃>이다. 알싸하고 향깃한 냄새가 난다고 소설에 묘사돼 있다. 노랫말 <소양강 처녀>와 강원도 아리랑에 자주 나오는 <동박>이 바로 김유정의 동백꽃이다. - 관련작품 : 동백꽃, 산골 05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19살 산골 나그네가 병든 남편을 물레방앗간에 숨겨놓고 노총각 덕돌이와 위장결혼했다가 도망간 이야기가 담겨 있는 길. - 관련작품 : 산골나그네 06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복만이 소장수 황거풍한테 매매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은 뒤 덕냉이로 도망치던 고갯길이다. - 관련작품 : 가을 07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춘호처가 도라지 더덕을 찾아 맨발에 짚신짝을 끌며 강파른 산등 칡덩굴에 매달리기도 하며 남편이 원하는 돈 이원 구할 궁리를 하던 그 산길. - 관련작품 : 소낙비 08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너 데련님하구 그랬대지?’ 먼 하늘만 쳐다보며 도련님 생각만하고 있는 이쁜이한테 석숭이가 투정 섞어 사랑고백을 하던 곳이다. - 관련작품 : 산골 ※ 이 작품에도 <노란 동백꽃> 이야기가 나온다 09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 금병산 산신을 모신 전각으로 가는 길. 지금도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산신각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지낸다. 금병산을 왜 진병산이라고도 부르는지, 그리고 이 전각에 가면 왜 산신제 때 술 대신 감주를 쓰는지도 알 수 있다. 산신각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신라 때의 고분군 흔적을 볼 수 있다. 10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인제에서 빚잔치 벌이고 도망 온 응칠이가 닭 잡아 생으로 뜯어먹으며 송이 따던 길. - 관련작품 : 만무방 11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일제 강점기에 농촌 사람들이 얼마나 가혹한 삶을 살았는가를 수아리골 저 다락논이 증언하고 있다. - 관련작품 : 만무방 ※만무방-체면도 염치도 없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말 12 근식이가 자기집 솥 훔치던 한숨길 계숙이란 들병이의 꾐에 빠져 자기 집의 솥을 훔쳐 나오던 근신이네 집이 있던 곳이다. - 관련작품 : 솟 13 금병의숙 느티나무길 김유정이 금병의숙을 지어 야학 등 농촌계몽 운동을 벌일 때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4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점순이, 봉필영감, 학곡리에서 홀어머니 모시고 살다 장가가기 위해 데릴사위로 들어온 최씨 등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그 현장이다. - 관련작품 : 봄 · 봄 15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 김유정이 자주 찾아 코다리찌개로 막걸리를 먹던 주막집이 있던 곳이다. - 관련작품 :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16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 ‘ 저는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 증리 아랫말에 사는 김덕만입니다. 저는 설흔넷인데두 총각입니다.’ 덕만이가 들병이한테 자기 소개하는 장면이다. - 관련작품 : 총각과 맹꽁이 [작가연보] 1900년대) 1908년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남내이작면(南內二作面) 증리(甑里-실레) 427번지,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서 부친 김춘식(金春植) 모친 청송(靑松) 심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출생, 10대조 김육(金堉)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실학(實學)의 선구자였으며, 9대조 김우명(金佑明)은 현종(顯宗)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였고 숙종(肅宗)의 외할아버지였다. 고조부 김기순(金基恂) 때 춘천 실레마을로 이주했다. 증조부 김병선(金秉善)은 실레마을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거유(巨儒)인 김평묵(金平默)을 초빙, 학당(學堂)을 열고 자제들을 교육케 했다.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 학풍(學風)을 이어받은 조부 김익찬(金益贊)은 춘천 의병(義兵) 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했다. 조부 때 6천석 추수를 하는 춘천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도사(都事)벼슬. 김유정이 탄생하는 그해에 춘천의 2차 의병봉기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기세가 드높았다. 1910년대) 1914년 1914년 11월 26일 유정의 조부 도사(都事)벼슬을 했던 김익찬(金益贊)사망. 이때부터 부친 김춘식(金春植)을 참봉으로 호칭. 이해 겨울에 한양(漢陽-지금 서울)의 종로구 운니동(당시 진골)에 대저택을 마련, 가족이사. 춘천에 집을 그냥 두고 소작농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함. 1915년 1915년 7세. 3월 18일 어머니 청송 심씨 사망. 춘천에 내려갔던 형 유근(裕近)이 미처 오지 못하자 홀로 상주가 됨. 1917년 1917년 9세. 5월 23일 아버지 김춘식 사망. 고아가 됨. 형님과 형수 누님의 사랑을 받음. 운니동(雲泥洞)에서 관철동(貫鐵洞)으로 이사. 1919년 봄까지 3년 동안 한문 공부와 붓글씨를 익힘. 김유정 작품에 나타나는 동양 고전지식은 이때 익힘. 1920년대) 1920년 1920년 12세. 재동공립보통학교(齋洞公立普通學校)에 입학. 재동공립보통학교가 있던 지역은 당시 우리나라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중심지 1921년 13세. 3학년으로 월반 1923년 1923년 15세. 재동공립보통학교 4년 (제16회)졸업. 4월 9일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검정(檢定)으로 입학. 숭인동(崇仁洞) 80번지로 이사. 학적부에는 가족 11명, 형제 2명, 재산 5만원 성질을 질박, 키는 5척. 이름을 김나이(金羅伊)로 고쳐 집에서 부름. 소설가가 된 안회남(安懷南)과 같은 반으로 각별히 친하게 지냄. 1926년 1926년 18세. 휘문고보 3학년을 마치고 휴학 1927년 19세. 휘문고보 4학년에 복학 1928년 20세. 형 유근가족 춘천 실레로 이사. 유정은 봉익동 삼촌댁에 얹혀 지냄. 인간문화재 박녹주(朴綠珠) 공연을 처음 관람 1929년 1929년 21세. 휘문고보 5년 졸업(제 21회). 삼촌댁에서 사직동 둘째 누님 유형(裕瀅)집으로 거처를 옮김(누님은 이혼 후 양복공장 근무) 1930년대) 1930년 1930년 22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交)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6월 24일 학칙 제 26조에 의거, 제명처분 당함. 박녹주를 짝사랑했으나 끝내 거절당함. 춘천 실레에 내려와 방랑생활. 들병이와 친해짐. 늑막염 재발. 안회남의 권고로 소설을 씀 1931년 1931년 23세. 4월 20일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법과에 다시 입학. 그 후 자퇴함. (퇴학자 명단에만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은 없음). 실레 마을에 야학당(夜學堂)을 열다.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 조직. 농우가(農友歌) 지어 부름. 1932년 1932년 24세. 야학당을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넓히고 간이학교로 인가받음. 느티나무를 식목함. 6월 15일 처녀작 단편 <심청>을 탈고(4년 뒤인 1936년 중앙지에 발표). 1933년 1933년 25세.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서 누님과 함께 기거. 폐결핵 발병진단. 1월 13일 <산골 나그네> 탈고, 안회남의 주선으로 제1선지 3월호에 발표. 8월 6일 <총각과 맹꽁이>를 탈고, 신여성 9월호에 발표. 공식적으로 발표된 작품으로 쳐서 처녀작은 <산골 나그네>가 됨. 사직동 시대 유정은 톨스토이가 되고자 함. 이석훈(李石薰), 채만식(蔡萬植), 박태원(朴泰遠), 이상(李箱) 등을 만남. 1934년 1934년 26세. 누님이 사직동 집을 처분. 혜화동 개천가에 셋방을 얻어 밥장사. 충남 예산 등지의 금광을 전전함 8월 16일 <정분> 탈고. 9월 10일 <만무방> 탈고. 12월 10일<애기> 탈고. <노다지><소낙비>를 12월에 탈고. (1933년의 <흙을 등지고>를 1934년 <따라지 목숨>으로 개작, 신문사와 협의 <소낙비>가 됨) 안회남이 대신 신춘문예 응모작으로 부침. 1935년 1935년 27세.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소낙비>1등 당선.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노다지>가작 입선. 1월 20일 아서원서 신춘문예현상 1등 당선 축하회. 6월 3일 백합원서 조선문단사가 주최한 문예좌담회에 참석. 김유정은 안회남(安懷南), 김남천(金南天), 이학인(李學仁), 박영호(朴英鎬), 이선희(李善熙), 함대훈(咸大勳), 이헌구(李軒求), 이석훈(李石熏), 김환태(金煥泰), 이무영(李無影), 한인택(韓仁澤), 서항석(徐恒錫), 정지용(鄭芝溶), 김희규(金憘奎), 이하윤(異河潤), 김광섭(金珖燮), 방인근(方仁根), 최정오(崔定吾)와 함께 연회에도 참석했다. 단편 <금따는 콩밭>, <개벽> 3월호, <금> 영화시대, <떡> 중앙 6월호,<만무방> 조선일보 7월, <산골>조선문단 7월호, <솟>매일신보 9월, <홍길동전> 신아동 10월, <봄·봄>조광 12월호 등을 발표한다. 이 한해에 소설 11편과 수필 <잎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조선 중앙일보 3월 6일,<조선의 집시-들병이 철학>매신일보 10월, <나와 귀뚜라미>조광 11월호 등, 3편을 발표, 6월 3일 <조선문단>이 주최한 문예좌담회에서 이태준(李泰俊)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임. 구인회(九人會) 후기 동인으로 참여. 이상과 깊은 친분을 가짐. <안해>를 사해공론(四海公論) 12월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찬사를 받음. 1936년 1936년 1월부터 8월까지 9편의 소설과 4편의 수필을 발표. 단편<심청>중앙1월호, <봄과 따라지>신인문학 1월호, <가을>사해공론1월호,<두꺼비>시와 소설, <봄밤>여성 4월호, <이런 음악회>중앙 4월호, <동백꽃>조광5월호, <야앵>조광7월호, <옥토끼>여성7월호 가 각각 발표됨. 미완의 장편소설 <생의 반려>는 중앙 8,9월호에 연재됨. 수필<오월의 산골짜기>,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전차가 희극을 낳아>, <길>등을 5월에서 8월 사이에 발표하고 <행복을 등진 정열>은 여성지 10월호에, <밤이 조금만 짤렀드면>은 조광지 11월호에 발표. 단편소설 <정조>는 조광지 10월호에, <슬픈 이야기>는 여성지 12월호에 발표, 마지막 여인 박봉자를 짝사랑하였다. 병이 깊어져 김문집이 병고작가 구조운동을 벌임. 1937년 서간문 <문단에 올리는 말씀>을 조선문학 1월호에 게재. 수필 <강원도 여성편>여성 1월호, <병상 영춘기>조선일보 1월 29일∼2월 2일 발표. 2월 조카 진수에 의지하여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100번지의 매형 유세준의 집에 옮겨와 요양 치료함. 소설 <따라지>조광 2월호, <땡볕>여성 2월호, <연기>창공 3월호 발표. 서간문<병상의 생각>을 조광지 3월호에 발표하고, 세상뜨기 11일 전인 3월 18일 <필승전>으로 되어 있는 마지막 편지를 안회남에게 보냄. 3월 29일 오전 6시 30분에 30세의 나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100번지 매형 유세준의 집에서 사망함. 서대문 밖(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유해는 한강에 뿌려짐. 이 해의 사후 발표작으로 수필 <네가 봄이런가>여성 4월호, 단편소설 <정분>조광5월호, 번역동화 <귀여운 소녀>매일신보 4월 16일∼21일, 번역 탐정소설 <잃어진 보석>조광 6월∼11월호 발표됨. 1938년 1938년 단편집 <동백꽃>(三文社) 발간됨. 1939년 1939년 사후 발표된 소설로 <두포전> 소년1∼5월호, <형>광업조선 11월호, <애기>문장12월호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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