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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신춘문예당선작

by 정령시인 2011. 1. 7.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 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쟎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 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늘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거에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 버릴 집을 지은 걸까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조세희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늘의 운세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유빙 <流氷>/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새는 없다 /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