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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변영로의 대표 시 모음

by 정령시인 2011. 9. 25.

버러지도


           1


 버러지도 싫다 하올 이 몸이

 불현듯 그대 생각 어인 일까

 그리운 마음 자랑스럽습니다.


 촛불 밝고 마음 어두운 이 밤에

 당신 어디 계신지 알 길 없어

 답답함에 이내 가슴 터집니다.


           2


 철 안나 복스럽던 옛날에는

 그대와 나 한 동산에 놀았지오,

 그때는 꽃빛도 더 짙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둘이 강가에 놀 때

 날으던 것은 흰 새였건마는

 모래 위 그림자는 붉었습니다.

 

 바로 그때 난데없는 바람 일어

 그대와 나의 어린 눈 흐리워져

 얼결에 서로 손목 쥐었습니다.


           3


 그러나 바람이 우리를 시기하였던가

 바람은 나뉘어 불지 아니하였으련만

 찢기는 옷 같이 우리는 갈렸습니다.


 이제도 그리움이 눈 흐리울 때

 길에서 그대 비슷한 이 보건마는

 아니실 줄 알고 눈 감고 곁길로 가옵니다.


          *《수주시문선》(1959)

 

님이시여


 님이시여,

 왜 나를 보고 외면을 하십니까?

 당신의 마음을 내가 아는데요!


 님이시여,

 왜 당신의 눈이 웃으십니까?

 당신의 설움을 내가 아는데요.


 님이시여,

 왜 새삼스러이 우십니까?

 당신의 기쁨을 내가 아는데요.

 

 님이시여,

 왜 어디로 가시렵니까?

 변치않는 당신임을 내가 믿는데요!


   *《조선의 마음》(1924)

 

 

땅거미 질 때


 해 진 뒤라 문(門) 지치고 빗장을 굳게 질러

 뉘 와 불러도 여지 마자 하였더니

 

 닫기었던 어린 마음 틈같이 벌더니만

 지킨 듯 그의 생각 어느 결 뛰어들어


 가뭇없던 모습 숨결같이 가차움에

 즐거운 괴로움 온몸에 숨이 인다―


 식은 재 되붙듯이 잊힌 시름 다시 깨니

 몸 한결 고달파도 마음만은 진동한동

 

 나비 쫓안 꽃핀 데요 벌레 따란 그늘이며

 달에 홀린 바닷가요 소리에 끌린 골짝이나


 허튼 말 뉘 믿으리 죽은 새 나래 친단……

 불사조(不死鳥) 본 제 없어 환영(幻影) 고이 묻으리라


 *《한국시인전집》(1955)




꿈 팔아 외롬 사서


 꿈 팔아 외롬 사서

 산(山)골에 사쟀더니

 뭇새 그 음성 본을 뜨고

 갖은 꽃 그 모습 자아내니

 이슬, 풀, 그 옷자락 그립다네.


 꿈 팔아 외롬 사서

 바닷가에 늙쟀더니

 물결의 수(數)없는 발 몰려들매

 하늘과 먼 돛과 모래밭은

 서로 짠듯 온갖 추억(追憶) 들추인다.


 꿈과 외롬 사이 태어나서

 외롬과 꿈 사이 숨 지나니

 별이 하늘에 박힌 듯이

 달이 허공에 달리 듯이

 꿈과 외롬의 두 틈 사이

 잠자코 말없이 살으리라.


  *《수주시문선》(1959)

 

 

사벽송(四壁頌)

 

 밖에는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또는 바람마저 부는지도 모른다

 단 한 칸인 내 방(房) 네 벽(壁) 안만은

 천심(千尋) 물속 같이 고요킬래.


 남의 곡식 먹는 참새 같이

 나면서 가난한 나인 바에

 이 누리 안 의지할 곳 어디인가

 이 누리 안 고마울 것 무엇인가

 초라한 채 몸 담은 이 네 벽뿐을.


 바람만 뚫지 않고

 비만 스미지 않는다면

 아아, 이 네 벽의 ‘수호(守護)’ 없던들

 내 이제 어디로 헤매었을꼬

 생각만 하여도 놀라웁고녀.

 

 네 벽이 나를 지키이매

 내 또한 네 벽을 길이 지키리라

 촌보(寸步)라도 네 벽을 내어 디디면

 그 네 벽 밖은 수토(殊土)요 이향(異鄕)이리!


*《수주시문선》(1959)




대군애(待君哀)


 아닌 밤중 난데없이 방울이 울어

 뉘 타신 수레인지 바퀴소리 나기에

 조이고 조이는 마음 귀에만 모으고서

 창틀에 비기어 쭝깃하고 들으렸더니

 돌아서 가심인가 딴 길 잡아드심인가

 가까워 오던 그 애틋한 수레소리

 다시금 멀어지네 멀어지어―

 아아 아쉬웁고 애달프다

 어느 때나 바람 자고 구름 트이며

 그립고 그리운 님의 환한 모습

 해나 달 같이 우러를거나

 해나 달 같이 모시울거나.


 *《교열본 수주 변영로 시전집》(1989)


 * 대군애(待君哀) : 님을 기다리는 애절한 마음.



긴 강물이 부러워



 마음겨운 옛날의 시인(詩人)은

 인생이 하도 총총타 하여

 흐르는 긴 강물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흐르는 긴 강물 부러워하되

 옛 시인의 슬픔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살림 하도 뷔이고

 거칠기 마른 동산 같으매

 충충한 긴 강물 부러워함이요


 우리의 생각 하도 갈피 없고

 잘 변하기 철바뀜 같으매

 꾸준한 긴 강물 부러워함이며


 우리의 마음 하도 졸들고

 가난하기 뷔인 그릇 같으매

 굽이치는 긴 강물 부러워함입니다


 마음겨운 옛날의 시인은

 인생이 하도 덧없다 하여

 흐르는 긴 강물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인생이 하도 보람 없어서

 흐르는 긴 강물 부러워합니다


 *《한국시인전집》(1955)



몽미인(夢美人)



 꿈이면 가지는 그 길

 꿈이면 들리는 그 집

 꿈이면 만나는 그이


 어느 결 가지는 그 길

 언제난 낯익은 그 길

 웃잖고 조용한 그 얼굴―


 커다란 유심한 그 눈

 다문 채 말없는 그 입

 잡으랴 놓치는 그 모습


 어찌다 깨이면 그 꿈

 서글기 끝없네 내 마음

 다시금 잠 들랴 헛된 일


 딱딱한 포도(鋪道)를 걸으며

 짝 잃은 나그네 홀로서

 희미한 그 모습 더듬네


 머잖아 깊은 잠 들 때엔

 밤낮에 못 잊는 그대를

 그 길가 그 집서 뫼시리


    (1954)

   

 *《한국시인전집》(1955)




바람은 베일 수 없듯이



 바람은 베일 수 없듯이

 물이면 끊을 수 없듯이

 한 나라 한 겨레인 다음

 좌우를 가를 수 있으랴

 남북을 헤칠 수 있으랴


 백두 한라 삼천리는 옛말이온

 생각만 해도 피 끓고 숨 끊기리

 ‘소비에트 백두(白頭)’ ‘아메리카 한라(漢拏)’라면

 양단(兩斷)된 그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그 어인 놀라운 운명의 작희(作戱)이랴


 흡반(吸盤) 돋은 팔초어(八稍魚)에 감긴 듯이

 잡히면 헤어날 길 없는 그 불행

 짓궂게도 밀려들고 달려들어

 우리의 손발만을 묶어 놓는가

 뵈지 않는 사슬 마음마저 묶고녀


 이 치욕의 화액(禍厄) 없애려면

 일초(一秒)라 주저가 있으랴

 불순(不純)코자 딴 상념(想念) 죽이고

 빛 향해 알몸으로 나서라

 나서라, 데이프로우펀디스!



*《수주 변영로문선집》(1981)




잠 놓친 밤



 밤은 고요할 대로 고요한데

 잠은 어이하여 오지를 않는지

 

 새삼스레 걱정 더럭 됨이 있어선가

 그도 꼭은 그렇지를 않건마는


 딱따기 두 차례나 돌았어도

 잠은 길 떠난 사람 같이 안 오아

 

 아하 어이없이도 호젓하구나

 내 마음은 사람 묏다 헤진 빈 마당


 아하 야릇하게도 괴괴하구나

 가죽 밑 도는 피 소리 또렷키도 하예


 활활 타는 두 눈 붙이고 누웠노라니

 귓속에선 무엔지 잉 하고 운다.


 그 무슨 소릴까 그 무슨 소릴깨

 옛날의 풍경 소리까지 새새 섞이나니


 가라앉아라 내 어리고 어리석은 마음이어

 오늘밤은 뒤치고 뒤치매 잠 못 이루나


 그 저녁이 오면 괴롬의 붉은 놀 스러지고―

 꿈조차 섞이지 않는 깊은 잠에 빠지리


*《교열본 수주 변영로 시전집》(1989)




 늙은 새



 설 힘조차 없는 늙은 새

 군혹까지 늘어진 할아버지 새

 떨어지는 깃(羽) 간신히 추스르는

 힘 없는 새

 벌써 흐리어진 그대의 눈

 무엇을 꿈꾸는가!

 먼 물가인가?

 젊었을 때를 그림인가?

 비록 하늘의 비밀은 캐어내고

 땅과 바다의 신비는 헤쳐대도

 수그리고 웅크린 그대의 안과 속은

 내 알 길 바이없고나!



 *《수주 변영로문선집》(1981)




중얼거림



 환한 대낮에 잃었던 그 길

 밤이면 내 홀로 헤매는 그 길!


 들끓는 사람 틈 놓치인 그대

 어쩌다 꿈에나 만나는 그대


 내 어이 말하랴 애틋한 그를

 나 혼자 그리다 시어질 그를


 끓이고 태우다 잦아질 시름

 고이고 붓나니 쌓이는 시름


 낮밤에 못 잊는 불멸의 영상(影像)

 큰 번개 치는 날 만나리 만나리


    *《교열본 수주 변영로 시전집》(1989)




그 음성 듣고 지고



 잠시인들 잊으랴 그 음성

 몽매 사이라 잊으랴 그 음성

 나무 틈을 새이는 바람 소리 같고

 가문 땅을 적시는 빗소리 같으매

 자각돌 새 스치는 샘소리 같은!

 모습도 그립지만 그 음성 듣고 지고

 구름을 비집고 나오려마 그 음성

 바위를 뚫고 나오려마 그 음성


 외롭고 싀으고 괴로운 이 겨레

 올데갈데없이 헤매이는 이 겨레

 밤과 낮으로 듣느니 허튼소리뿐을

 사랑 없는 속삭임 양심 없는 외오침

 지더린호령 모두 ‘소리 나는 꽹과리’라

 속삭인다 속을재 그 뉘이고

 외오친다 귀 기울일재 그 뉘이며

 꾸짖는다 겁내일재 그 뉘이랴


 일시도 못 잊히는 그 음성

 꿈에도 못 잊히는 그 음성

 바람에 실려 오려마 그 음성

 물결을 타고 오려마 그 음성

 이 겨레의 거짓없는 그 음성

 자나깨나 듣고 지고 듣고 지어!




  해를 나려 그러한지



해를 나려 그러한지

새벽하늘 괴뤼뵌다

울멍울멍 울쌍같으예


무엇나려 그럼인지

나의 마음 부대끼나

낫는대도 핸아닐게지


어둠 속에 태어나서

어둠 속에 자랐거니

남은 날도 밝든 못하리


빛 못 보는 소경고기

밤이 낮인 올빼미도

일 없는 양 지내이것만


죄는 마음 부질없이

그 밝은 빛 환한 얼굴

아프게도 그리웁고나


(註: 소경고기는 접원(蝶螈)을 가리킴)



    《동아일보》(1937. 10. 3)





  다 자는 밤


다 자는 밤 홀로 거니니

밤은 물 속 같이도 깊은데

귀에 익은 소리 끊어지고

못 듣던 소리 들리우네—


뿌려 놓은 듯한 별 하날

바라보고 또 바라봄에

별은 숨고 빛은 늘여서

온 하늘 빛바다 이루네


부신 눈 가려보진 못하나

찬란한 님의 저자 예인듯

부은 듯 메인 목소린 못 치나

이름 모를 노래 가슴에 붓네


거룩할사 님의 <말없는 말>

어둠 속에 빛나는 님의 빛

나는 그 음성 그 빛 그리워

낮 아닌 밤하늘 밑 거니네


  

  《이화》 제2호 (1930)


 

 

논개(論介)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수주시문선》(1959)



 줄 타는 어린 광대



사내바지 입은 어린 계집애 광대

울긋불긋한 큰 부채 펼쳐들고

위태위태하게 줄의 이 끝으로 저 끝

갔다가는 오고 오고는 다시 가다

줄 한복판에 두 다리 늘이고 앉아

제 딴엔 고작 힘드는 것 한다는 듯

목쉰소리로 무엇인지 외오친다

아 가엾구나 애처로운 어린 광대

이 괴론 세상 삶이 벌써 줄타긴데

재주답지 않은 것 재준 양하여

맘 무딘 사람들의 값싼 칭찬 받으려

줄 위에 섰느냐 아 가엾은 신세여!


      《조선일보》(1929.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