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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수 백 가지 천사의 얼굴/로라 워드, 윌 스티즈 공저

by 정령시인 2016. 9. 20.

[도서]수백 가지 천사의 얼굴

로라 워드,윌 스티즈 공저/김이순 역
안티쿠스 | 2007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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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꿈을 꾸었다. 푸른하늘위로 뭉게구름이 떼지어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중 구름뭉치 하나는 꼭 도마뱀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참 신기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도마뱀의 구름이 진짜 용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입에서 붉은 불덩어리를 내뿜기 시작했다. 덩달아 다른 구름들도 모두 제각기 무서운 동물의 모양으로 변해 빠르게 하늘위로 지나갔다. 순간 두려움에 떨었고 꿈에서 깨어났다.

 

뚱딴지같은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조차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알수없는 경이와 경외, 혹 두려움에 빠지곤 한다는 사실이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여러행태로 풀어내었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산짐승이나 인간을 바치면서 하늘의 자비를 구하고 노여움을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 중동에서 일어나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였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등은 그 하늘을 쳐다보며 천사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하늘을 날고자하는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에 날개를 달고 인간을 수호해주는 천사야말로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커다란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 원형은 그리스신화의 이카루스의 날개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뭏든 그러한 아이디어는 어느새 종교와 결합해 정교한 이미지와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천사를 만들어내었고 그 천사는 곧이어 악마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천사는 환한 웃음을 띤 어린아이를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 <수백가지 천사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정말 천사의 종류는 지문의 다양함만큼이나 각양각색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천진난만한 아기천사부터 소년, 소녀, 그리고 청년천사에 이르기까지....  표정도 다양하다. 웃고 있는 아기천사, 평화로움속에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천사, 죽은 그리스도 주위에 슬픔이 가득찬 표정으로 지켜보는 천사, 선악을 저울질하는 냉정한 천사, 악마와의 싸움으로 화난 표정의 천사, 심지어 해골상에 박쥐날개를 단 섬뜩한 천사에 이르기까지.....

 

책을 보며 '원죄'라는 낱말을 떠 올려야 했다. 어차피 연약한 인간은 무엇인가에 의지하게 되어 있는 존재지만, 책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수많은 천사아래 인간은 정말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를 거쳐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 성경구절을 그대로 믿으며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고, 또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의 모습을 실제로 믿었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날에 천사의 나팔소리에 관속에 있던 자들이 모두 육체적으로 깨어나고 그 위에 저울을 가진 커다란 천사가 선과 악을 판단해 천국과 지옥행을 결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림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책을 보며 당대 사람들의 두려움과 그것을 이용한 교회라는 절대권력이 만들어냈을 부정적인 모습을 떠 올려야 했다.

 

평화로운 천사만큼 칼과 창, 방패로 무장한 천사들의 모습도 이색적이었다. 현대사회가 인간만큼이나 희노애락과 평화와 전쟁의 모습을 간직한 천사를 그저 웃는 아기모습의 평화로운 수호자의 모습으로만 변질시켜버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당시, 그리고 중세시대의 천사는 오늘처럼 그저 천진난만하지 않았다. 사탄에 맞서 완전무장을 한채 때로는 무자비하게 창과 칼을 휘둘렀다. 평화와 전쟁은 사실 상극이 아니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경우가 많다.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영적인 전쟁을 치뤄 승리하지 않은 자는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없다. 예수의 손에 난 못자국위로 흐르는 붉은 피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상극되는 것들을 통해서 온전한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치가 그러하며 천사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의 다양한 그림들이 보여준다. 그런데 오직 어린아기같은 천진한 한쪽의 천사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진정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유익함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이는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고대의 동화는 잔혹했다. 지금처럼 부드러운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는 없었다. 하지만 잔혹한 동화는 힘든 노동의 시대를 살아야했던 당대의 아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부드럽고 착하기만 한 권선징악의 동화는 당대의 아이들이 살아나가는데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 나약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림이든 이야기든 그 배경에는 시대상황이 있는 법이다. 그런면에서 오늘날의 시대가(대중문화가) 천진난만한 한쪽의 천사만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의식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진한 천사와 더불어 악마와 무자비한 싸움을 벌이는 무장한 천사의 모습도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수태고지를 하면서 마리아의 주위에 경건함으로 있는 천사의 모습이나, 악마와의 싸움에 무기로 무장한 채 격전을 벌이는 천사의 모습은 우리안에 있는 선악의 싸움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거시의 세계와 미시의 세계는 결국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슬며시 웃음짓게 만드는 그림하나가 있다. 177쪽에 있는 이 그림은 사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사의 모습은 아니다. <활을 깍는 큐피드>라는 제목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화살을 쏘는 사랑에 눈을 멀게 해 주는 신의 그림이다. 큐피드의 등에 달린 날개때문에 천사로 분류된 것 같다. 책의 주석을 보자.

 

큐피드는 천진하게 두 권의 책 위에서 활을 깍고 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지혜의 단어를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다리 사이로 두 명의 '푸티'(아이)가 보이는데 그중 하나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살기 넘치는 칼에 베었을까? 아니면 사랑의 신의 불에 닿에 데었을까?) 이 고전적인 주제는 사랑을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라고 본 르네상스의 좀 더 은밀한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사랑은 지식으로 얻을 수 없다. 이성과 지식의 상징인 책을 덮어버려야 감성의 혜안이 눈을 떠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큐피드는 책을 발로 짓밝고 사랑의 활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그 활을 맞은 아이는 사랑에 기뻐하거나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인상을 쓴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사랑의 화살의 본질은 쾌락, 즐거움속의 고통일때가 많다. 그래서 주석은 사랑을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라고 본 르네상스시대의 개념을 설명해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 재미있다. 사랑을 고통의 본질로 보면서 큐피드를 통해 이를 형상화한 그림하나.... 무엇인가 깨닫게 해 준다. <전쟁의 천사>를 현대가 잊고 살듯이 사랑의 고통을 무시한채 너무 로맨틱한 일회성 쾌락에 매달려 살아가는게 우리시대의 사랑이야기에 대해 큐피드의 그림은 경종을 울려주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고대나 중세시대의 엄격한 수도승적인 삶의 태도로 돌아가야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하지만 너무 가볍고 편안하며, 눈과 입 귀는 즐겁지만 영양가가 쏙 빠져버린 인트턴트문화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이즈음.... 옛 천사들의 그림은 우리에게 전쟁과 상처, 아픔도 같이 삶에 동반되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온전하고 통일된 모습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속에 비로소 승리한 그리스도의 삶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무시한 채 천국만을 바라는 태도는 우리시대가 너무 현학적이며 눈에 보이는 즐거움만 추구하도록 끝없이 세뇌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된다. 종교를 너무 경건하게 있는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의 사랑과 투쟁을 형상화한 천사들을 통해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현실은 고달프다) 적당히 마취시켜 왜곡해버리는 지금의 대중문화, 그속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말이다. 대중문화의 달콤함은 우리가 (지극히 당연한) 현실의 고통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과 배움, 영적으로 성숙해질 기회를 차단시켜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