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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무라카미 하루키

by 정령시인 2016. 9. 20.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 민음사

발매 2013.07.01.


줄거리

나고야에서 태어나 자란,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이다. 다자키 쓰쿠루라는 이름은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가 유년기를 거쳐 고등학교 시절 만나는 친구들은 아카, 아오, 시로, 구로 라는 색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친구들을 만난다. 다섯 명의 친구들은 모여서 서로에게 안정감을 느끼며 각자의 부족한 부분들이 정확히 채워져 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다섯 명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며 누구 하나 없으면 안되는 그리고 누가 들어와도 균형이 깨지는 그러한 친구 관계를 형성한다. 쓰쿠루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속에서 안정감, 즐거움, 행복을 느낀다. 쓰쿠루는 친구들의 이름처럼 그들의 색을 분명히 느끼지만, 자신에게는 색이 없는 무채색의 쓰쿠루라는 생각을 갖는다. 친구들처럼 개성이 강하지도 않고, 오직 철도 역만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런 그들의 관계에 큰 변화가 오는 것은 대학을 진학하고 나서다. 네 명의 친구들은 원래 그랬던 것 처럼 관계를 유지하고 지낸다. 하지만 어느 날 쓰쿠루는 친구들로 부터 통보를 받는다. 이제 우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갑작스런 통보에 절망한 쓰쿠루는 자신의 삶이 산산 조각난 것 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스스로 일어서고 시간이 흘러, 도쿄의 철도회사에 취직을 해, 그가 원하던 역을 만드는 일을 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날 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야기를 전해준다. 무척이나 마음에 든 쓰쿠루는 자신의 유년 시절의 친구들 이야기까지 해준다. 사라는 듣던 중 이 이야기가 쓰쿠루의 깊은 상처이며 수동적으로 마냥 묻어 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게 옛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라며 조언한다.
이 때부터 쓰쿠루는 새로운 친구들을 찾아가 그 시절 자신이 그룹에서 추방당해야 했는지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아오의 현실과 겹친 망상에 의해 추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릴 때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색채에 대해서도 깨달아 간다.


서평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 이야기인 양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 생각인지, 온전한 나의 모습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또한 현재도 그렇지만, ‘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매우 궁금했다. 내가 나로서 살고 있지만 항상 내 모습에 대한 정확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내 색은 일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붉은 색, 검은 색, 파랑 색으로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며 내 모습을 표현해냈다. 그래서 만의 색은 무엇일까 라는 고민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지금도 이 고민은 계속 남아있다. 변하지 않는 나의 색,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은 무엇이며, 과연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에게 색채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내 모습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무채색의 인간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 가서도 눈에 확 뛰는 성격은 아니지만, 항상 주변에는 분명한 색채를 가진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나는 그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 수 있었다. 어쩌면 친구들 사이에서 내 역할은 그런 것 이었을까? 색채가 없어 모든 색을 안정시켜주는 무채색, 아니라면 거울과 같이 색을 흉내 낼 수 있는 색상, 혹은 나는 오히려 검은색에 가까운 사람일까? 모든 색을 흡수해 내 색의 일부로 만드는 검은색, 그래서 심오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검을 현의 검은색. 아직 다 살아보지 않아서 대답할 수 없지만, 만약 꼭 해야한다면 무채색이나 검은색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그 색을 더욱 선명하게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색의 사람, 그래서 나도 내 색채에 알맞은 역할을 다하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을 뿐 아니라, 다양함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것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삶의 과제 중 하나가 아닐까.


당신은 무슨 색인가요?
혹시 색을 잃은건 아닌가요?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은 색을 잃지 않았나요? 당신의 색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느끼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색, 이를테면 어떠한 이물질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신만의 색채, 그런 색을 발견하기는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이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말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사회다.
사회에서는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며, 학교와 직장에서는 획일적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오직 생산성 혹은 성과(성적)으로 평가받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색채를 지키기 힘든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요리사는 웨이터를 증오하고, 그 둘은 손님을 증오한다.' 아널드 웨스커의 부엌이라는 희곡에 나오는 말이에요. 자유를 빼앗긴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를 증오하게 되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그런 삶은 살기 싫어요

인간의 근본적인 권리인 '자유' 우리는 위와 같은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함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소한 삶의 부분까지의 자유를 빼앗기게 만든다. '나'의 사소한 행동까지 지배하려는
판옵티콘 같은 사람들, 마치 인형놀이를 하듯이 듣기 좋고, 이유있어 보이는 말로
스스로의 설득력을 부여하고 그 위에 통제력을 얹어 사람을 부린다.
우리가 누군가를 증오하게 되는 이유는 그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자유를 가진 존엄한 인간으로 나도 모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 “창의력이란 사려 깊은 모방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현실주의자 볼테르가 한 말이죠.”
- "너도 그렇게 생각해?”
- “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에요.”
- “난 잘 모르겠어.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건 도대체 얼마만 한 가치가 있을까?”

창의력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정의다. 창의력이란 모방이다. 하지만 현실주의자 볼테르가 한 말에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사려 깊은이라는 단어가 큰 포인트 중에 하나 일 것이다. ‘사려 깊다라는 단어 자체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Thoughtful’로써 Ful이 접미사로 쓰이는 경우에는 무엇이 풍부한 상태를 나타낸다. 생각하는 것이 풍부한 상태, 즉 다양한 측면을 고려할 수 있고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풍부하게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한자로는 玄慮(현려)라고 쓰며, 현은 검을 현 혹은 심오할 현자를 사용한다. 심오하고 오묘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현실주의자 볼테르가 창의력을 하찮으며 현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했는지, 혹은 그 의미를 숨기기 위해 표현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 해석으로는 현실주의자의 말을 인용해 하는 말이므로 더욱 설득력이 있거나 대단한 것으로 표현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떨까. 그냥 표면적으로 아문 것처럼 보일 뿐인지도 모르잖아. 안쪽에서는 아직도 조용히 피가 흐르고 있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사람의 아픔은 치유되는 것일까? 혹은 치유 할 수 있는 것일까?
아픔을 치유한다는 것은 진정 어떤 의미일까?
흔히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곤 한다.
201687. 그날 밤에도 생각지도 못한 꿈을 꾸고 허겁지겁 잠에서 깨어난 적이 있다.
가슴 뼈가 떨릴 정도로 크게 뛰는 심장과 함께 말이다. 너무 생생한 꿈이다.
모래알 같은 꿈을 꾼 것 뿐인데,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일인데도, 가끔은 나를 괴롭히는 일이 있다.
나도 내가 겪은 상처들을 완전히 치유하고 넘어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칸트가 말했던 무의식, 사람의 뇌 깊이에 자리 잡고있는 무의식은 어쩌면
마음의 염증을 저장하고 있는 곳 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상처들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아픈 기억들을 꺼내어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미제사건으로.


분명 자기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낙담케 하는 뭔가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결국 남에게 내밀 수 있는 건 뭐 하나 가진 게 없어. 아니, 그러고 보면 나 자신에게도 내밀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
“아니, 그런 게 아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넌 있는 것만으로 우리가 자연스럽게 우리로서 거기 있을 수 있게 해주는 면이 있었어. 넌 별로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두 다리로 지면을 굳제 딛고 서서 우리 그룹에게 평온한 안정감 같은 걸 줬던 거야. 배의 닻처럼. 네가 떠나면서 우리는 새삼 그걸 실감했어. 우리한테는 역시 너라는 존재가 필요했다고.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떠난 이후로 우리는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했어.”

“잘 알겠지만,
나고야는 일본에서도 몇 안되는 대도시이지만 동시에 좁은 곳이기도 해.
사람은 많고 산업은 융성하고 물자는 풍부하지만 선택지는 의외로 적어.
우리 같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게
여기서는 간단한 일이 아니야.
이런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심장의 고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몸의 중심가까이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1년 내내 녹지 않는 동토의 중심부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것이 가슴의 통증과 숨 막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자기 안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태 그는 몰랐다.
그렇지만 그것은 올바른 가슴 아픔이며 올바른 숨 막힘이었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 차가운 중심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녹여 내야 한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색채가 흐려졌다고 할까. 강렬한 햇살 아래 오랫동안 드러나 있다 보니 색이 전부 바래 버린 것처럼. 겉모습은 옛날이나 다름 없었어. …. 그런데 본인은 더는 미인도 아니고 매력적이지도 않고 사람들 눈을 끌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하고 옛날처럼 여왕으로 행동하는 거야.”

“지각이란 그 자체로 완결되는 거지 뭔가 구체적인 성과로 바깥에 드러나는 건 아니야.
어떤 이익 같은 것도 없어. 그게 어떤 건지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해.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어. 다만 한 가지 자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일단 그런 진실의 정경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무서우리만치 밋밋해 보인다는 거야. 그 정경에는 논리도 비논리도 없어.
선도 악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돼 자네 자신도 융합의 일부가 되지. 자네는 육체라는 틀에서 벗어나 이른바 형이상적 존재가 돼.
자네는 직관이 돼. 참으로 멋진 느낌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절망적인 느낌이기도 하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하찮고 깊이가 없었는지,
거의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니까 말이야.
어떻게 이런 인생을 참고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전율하고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