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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박경리[토지]

by 정령시인 2017.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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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아담한 별당을 짓고 있었다. 기초에서부터 주춧돌을 놓고 차근차근히 치밀하게 공사는 진행된다. 기둥이 서고, 대들보가 올라가고 굴도리, 중중보, 하중도리, 마루보, 가중도리 그리고 마지막 마루도리까지 올라가고보면 집의 뼈대는 다 되는 셈이다.

기와가 올라가고 문짝들이 만들어지고 마루를 깔고 공정은 끝없이 계속된다. 방안 치장에는 열폭 병풍에 그림을, 가지가지 세간이 차례로 만들어진다. 화조문을 파는 마음의 손은 바쁘다.

중략)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 희망이 일렁이는 금녀 가슴에는 뜻하지 않았던 조바심이 아프게 바다의 파도가 방천을 치듯 쉴새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

중략)

여자의 목소리다. 별당아씨의 음성이다. 진달래꽃이파리다. 꽃송이다. 목소리는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가 된다. 붉은 눈송이가 된다. 핏빛 빗줄기가 내린다. 핏빛 눈물이 내린다.

중략)

개갈 하지않은 한 여자는 어느 하늘 밑에서건 버림받은 사내를 생각할 것이요 사내는 또 가끔 고독한 여자의 생애를 묵은 상처처럼, 궂은 날 묵은 상처의 통증처럼 마음 한구석에 떠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