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정약용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꾸다
丁若鏞
- 출생 - 사망 1762.6.16. ~ 1836.2.22.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을 떠올리면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귀양살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성실을 제일로 친 사람이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평생을 통하여 중단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탄생한 것이다.
1 수학과 관료생활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약용의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린 이유로, 큰 형 약현이'삼미집'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어릴 적 스승은 부친이었다. 10세 나이에 경사(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16세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었다.
마현에 터를 잡은 그가 서울 출입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15세에 서울 회현동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들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입신의 생활은 20대부터였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교유 관계를 넓혔다. 성균관 재학 시에 이미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28세에 마지막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다.
정약용은 23세에 이벽(李蘗)으로부터 서학(西學)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로 인해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지만, 이후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끝내는 서학에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지만,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천주교 문제가 터지기 전,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관직은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및 참의(參議) 등으로 승승장구하였다.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 설계 등 빛나는 업적도 많았다. 한때나마 외직으로 내몰리기도 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고마고(雇馬庫) 개혁, 가좌부(家坐簿) 제도 개선, [마과회통(麻科會通)] 저작 등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정약용은 가장 이상적인 관료가였다. 배다리와 기중가의 설계에서 이미 재능을 펼쳤지만, 그의 저작에서 엿보이는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민본(民本)이었다. 정약용은 왕정시대에도 주민 자치가 실현되기를 소원한 인물이다. 조선후기를 살았던 인물이었지만, 소박하게나마 민주주의를 지향한 인물이었지 않았을까.
2 기나긴 유배 생활의 시작
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은 정조였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환란이 없었지만,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정약용도 정조 사후에 완벽히 정계에서 배제되고 잊혀져 갔다.
사실 정약용은 관직에 나간 지 2년 만에 당색(黨色)으로 비판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가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배려로 열흘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다산시문집] 제4권에는 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정약용의 시가 전해진다.
빈소를 열고 발인하는 날 슬픔을 적다[啓引日述哀]
운기(雲旗), 우개(羽蓋) 펄럭펄럭 세상 먼지 터는 걸까 홍화문(弘化) 앞에다 조장(祖帳)을 차리었네
열두 전거(輇車)에다 채워둔 우상 말(塑馬)이 일시에 머리 들어 서쪽을 향하고 있네
영구 수레(龍輴)가 밤 되어 노량(露梁) 사장 도착하니 일천 개 등촉들이 강사(絳紗) 장막 에워싸네
단청한 배 붉은 난간은 어제와 똑같은데 님의 넋은 어느새 우화관(于華館)으로 가셨을까
천 줄기 흐르는 눈물 의상(衣裳)에 가득하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성궐은 옛 모습 그대로 있건마는 서향각 배알을 각지기가 못하게 하네 [다산시문집] 제4권, 시
유배 생활 처음에는 천주교도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천주교인이라는 소문으로 나자 모두 정약용을 모른척했다. 유배지의 어려움 속에서도 승려 혜장(惠藏) 등과 교유(交遊)하고, 제자들을 키우며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담배 역시 유배의 시름을 덜어주는 벗이었다.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머무른 곳이 사의재(四宜齋)라는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그곳에 기거하면서 예학 연구를 시작하였고, 이후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寶恩山房)과 목리(牧里)의 이학래(李鶴來) 집으로 전전하면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808년 귤동의 ‘다산초당’에 자리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천여 권의 서적을 쌓아 놓고 유교 경전을 연구하였다. 그의 이른바 주석 학문인 경학(經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3 마현으로의 귀향과 [여유당집]의 완성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57세에 해배되어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고향인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해배되었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지냈던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자신이 지은 많은 저술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도록 하기위해서였다. 초로의 나이에 더 이상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다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저술들을 널리 소개하여 읽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경세(經世)의 길이었다.
이후 자신의 호를 다음 시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즐겨 사용한 것 역시 그런 의미였다. 그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자신의 저술에 대해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는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고, 일표(一表)와 이서(二書)는 천하와 국가를 위함이니, 본말(本末)이 갖추어졌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육경과 사서에 관한 저술이 근본이라면,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는 경세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다.
해배 이후 학문적 교제를 했던 대상은 신작(申綽, 1760~1828)·김매순(金邁淳, 1776~1840)·홍석주(洪奭周, 1774~1842)·홍길주(洪吉周, 1786~1841)·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 당시 저명한 노·소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정권을 잡은 노·소론계였지만 고정된 정론이나 학설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경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경세관을 펼쳐 나갔다.
정약용이 가진 국가개혁의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국가개혁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경세유표]에서 그는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이 종합된 개혁사상을 전개하였다. 정약용의 개혁안은 장인영국(匠人營國)과 정전법(井田法)을 중심으로 한 체국경야(體國經野)라 평가할 수 있다.
통치와 상업, 국방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건설(체국)과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경야)을 바탕으로 세제, 군제, 관제, 신분 및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안의 주요 골자이다.
[주례(周禮)]의 체국경야 체제를 기본 모형으로 삼아 조선후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상공업의 진흥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경세유표]를 후대에도 계속해서 갈고 닦아야 할 ‘초본’이라 했다. 그가 펼친 국가개혁사상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 생명력을 가진 근대적 사상이었다고 할 것이다.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던 정약용은 양반제자 18명과 중인제자 6명이 각각 별도로 그의 아들과 더불어 자기가 경영하던 전답을 기본재산으로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였다.
또 초의(草衣)선사를 비롯한 만덕사의 스님들은 전등계(傳燈契)를 조직하게 하여, 길이 우의를 다지도록 했다. 그는 귀향 이후에도 옛 제자들과 서로 내왕하면서 강진에서 있을 때와 다르지 않게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다산의 저술활동은, 물론 다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과의 공동작업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다산의 많은 저서에는 공저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는데, 그러한 표기가 없는 경우에도 공동저작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목민심서]는 정용편(丁鏞編)으로 되어 있는데, 저술의 체계를 잡고 조목마다 편자의 의견을 붙이는 일은 다산 스스로가 행했지만, 각종의 전적(典籍)에서 자료를 수집·분류할 뿐만이 아니라 다산의 구술을 기록하고 정서(精書)·제책(製冊)하는 일은 모두 제자들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48권 16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목민심서]가 단 1년 이내에 저술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회갑을 맞은 1822년 다산은 인생을 정리한다. 자신의 장지를 정하고, 스스로 묘지명을 짓는다. 별호도 후대를 기약한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사용한다. 그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기존 저술에 대한 종합과 문집의 편집으로 나타났다.
[자찬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저작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으로 모두 499권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 이후 별세할 때까지 15년 동안 그는 [매씨상서평]을 개정하거나, [상서고훈]과 [상서지원록]을 개수하고 합편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으로 정리하는 등 저작에 대한 분합, 필삭, 윤색에 온 힘을 기울여 182책 503권의 가장본 [여유당집]을 완성하였다.
아들 정학연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여유당집]의 교열을 부탁했으며, 1883년(고종 20)에는 왕명에 따라 [여유당집]이 전사되어 내각에 수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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