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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강우식시인의 시에 대하여

by 정령시인 2018. 7. 31.

 

 

강우식, ?살아가는 슬픈, ?, (고요아침, 2013)

 

 

가을비1

사는 게 무서워서 속 시원히 울 새도 없었는데

누가 이리 한가하게 천지를 적시며 오시나.

 

 

고요

눈 내리다 그쳤다고 천지가 다 고요가 아니다

 

그것들을 들을 수 있는 그대가 있어 고요다.

 

 

불면

오죽하면 가랑대는 저 소리에 피 마를까

밤새 가슴앓이 환자처럼 가랑잎 가래 끓는 소리.

 

 

파리

비는 것이 어찌 그리 어머니를 닮았는지

손이 발이 되도록, 발이 손이 되도록…….

 

 

2행시로만 된 시가 수록된 시집을 읽는 마음은 우려 반 흥분반이었다. 절제와 압축의 묘미가 과연 2행이라는 그릇 안에서 어떻게 살아날까? 하는 의구심은 그야말로 우려에 그치고 말았다. 쉽게 쓰여진 시 같으면서도 깊이가 묻어나는 가편들이 너무나 많았다. 단단한 사유의 시들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서 시조를 읽는 맛과는 다른 매력을 풍겼다. 바둑돌 하나 하나를 신중하게 놓듯 시인은 언어를 선택했을 것이고 퇴고에 퇴고를 거쳐 아름다운 시 한편을 완성 했을 것이다.

분명 이번 시집은 강우식 시인에게 4행시의 실험보다 위험(?)하고 도발적인 것이리라. 그러나 시단의 평가가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그는 구애받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실험이 아니라 본능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찾아온 시적 본능을 시인은 그저 따랐을 뿐이다.

시집엔 아내의 부재에 대한 몸부림, 인간이나 자연 현상에 대한 의미를 추출해 내는 시들이 주를 이룬다. 그의 본능은 부재에 대한 몸부림을 가지고 있고 인생과 우주에 대한 통찰력도 가지고 있다. 앞에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이고, 뒤에 것은 일반적이고 이지적인 것이다. 그런데 강우식은 후자도 개인적 서정으로 치환하여 빼어나게 형상했다. 위에 네 편의 시는 그런 능력을 잘 보여주는 시다. 특별한 설명 없이 한번만 읽어도 시적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리고 시적 뉘앙스가 오래도록 번져간다. 이번 시집으로 2행시가 유행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압축과 절제의 묘미, 형식에 대한 실험의지는 모든 시인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하린

 

낙엽은, 한 여자가 생리일에 꾸겨버린 색종이처럼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가을 날
무덤 속같이 생각이 깊어버린 여자 곁에서
사랑이여, 우리가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사행시초 5

 

폐사廢寺 1

 

    강우식

    

 

강원도 양양 미천골 그 깊은 산골에는 어쩌다 발 디딘 나그네도 그냥 지나치는 절이 있다. 귀동냥으로는 신라 아무개 왕 때라는데 탑과 터만 남은 폐사다. 짐작컨대 이 절을 지은 스님은 깊은 골을 만든 산과 미천의 물소리만으로도 흡족했으리. 신라 시대니까 찾는 사람은 마음이 간절한 이 아니고 아무도 없어서 가끔 호랑이가 제 집 앞마당처럼 놀다 땀이 차면 철벙 앞개울에 몸을 담갔을 거로 짐작 된다. 스님은 인적이 드문 그런 것은 개의치 않고 산에 철따라 꽃피고 지고 언덕과 굽이굽이 구곡양장 골이 있고 험준한 산마루를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세상사 돌아가는 거 한눈에 꿰뚫을 수 있어서 독야청청. 요즘 세상에는 그런 스님 뵙기도 힘들어서 폐사여서 나대로 산 하나만 믿고서 절을 짓고 물소리를 독경삼아 귀 기울이었을 스님을 모셔본다. 이 절터는 지금 뜬구름 한 점 신세인 나그네뿐. 그나마 이런 조그만 사연도 읽어주는 이 없는 폐사여서 지나는 바람처럼 쓸쓸하다.

 

 

 

    

 

1.

경전 읽듯 산길을 조석으로 댕겼으면서도

스님이라고 다 산을 아는 것은 아니다. 산은 그렇게 어렵다.

 

2.

마음에 산이 보이면 산은 있다.

마음에 산이 없으면 산은 없는 거다.

 

3.

산이 좋아 산에서 죽는 것이 젤 행복하다는 사람을

산은 싫어한다. 그래도 사람은 죽기살기로 오른다.-가을인생

 


* 설야서정(雪夜抒情) - 강우식

저승과 이승을 건네이는
얕은 기침 소리 하나 없이
눈이 내린다.

오랜 기다림 속에 견디어 오던
사랑도
으로 남고

우리가 젊어서 눈물로 흘려버린 유서 한 장 만큼한
죽음같이 가벼운 부피로
하이얀 눈이 내린다.

!
눈 내리는 밤이면
시렁만큼 높은 곳에 마련되었을
관 속으로 나들이 갈
무명옷 한벌과

저승의 어느 길목에 가더라도
하얗게 살
내 가시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 뻘게 - 강우식

썰물이 지자
토정(土亭) 이지함의 도굴 당한
무덤, 개펄에는
구멍이 뚫렸다.

뻘게들이 나와서 집게 하나로
제 덩치의 천 배쯤
제 영혼의 억만 배쯤 되는
나를 집으려 했다.

살점인지 영혼인지 모르지만
누구도 가져가려 않는
내 몸과 마음을
차라리 저들에게나 주고 싶어졌다.

아침 바다에는
뻘게들이 옆으로 기니까
햇님도
이놈의 세상
나도 게걸음이나 한 번 해보자는 듯이
옆으로 기면서 떠올랐다.


* 매화 - 강우식

돌연변이로
남들보다 먼저 핀
매화 한 송이

오래도록
눈 마주하다

다른 봄날
수천 송이 꽃 앞에서
잃고 말았네.

이승에서의 틈은
찰나이거늘
찾으면 무엇하리.


* 겨울꿈 - 강우식

눈보라치는 날에 사랑을 하리
마른 살갗 비비듯
추녀 끝 무우청들은 서걱거려도
방안 난로 위 주전자는
궁둥이까지 달아서
더운 입김을 내뿜나니
줄 것을 다 준 후에
가진 것 없으면 어떠리
그녀의 흰 팔베개에 머리를 누이면
오히려 텅빈 넉넉함으로
깊고 아늑한 잠은 스며들고
어머니의 젖을 만지던
내 유년의 꿈같은 겨울로
눈보라가 데려가 주나니
나에게 이 세상의 다른 낮과 밤이
더 있어 무엇하랴
나는 어머니를 뵈러 가나니
나는 어머니를 뵈러 가나니


* 겨울 小曲 - 강우식

내 머리카락 하나쯤
그늬 겨드랑 속
어디메

아직
끼어 있을 법한
세월인데

또 그해의 눈이 내린다.

김장독 묻듯
겨울 산 언 땅 속에
두고 온
여자.

그늬 사랑
저승에서도
배추폭처럼, 배추폭처럼
잘 익어갈까.


* 사행시초(四行詩抄) - 강우식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은 한알의 사과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속
누가 이 순수한 外界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속의 우리를 알리.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큰 물구비를 넘어와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팍에 새삼 괴어 오르는 쓰린 눈물이여.


계집년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 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다섯
落葉, 한 여자가 生理日에 꾸겨버린 색종이로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가을날
무덤속같이 생각이 깊어버린 여자 곁에서
사랑이여, 우리가 할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여섯
밤마다 배꼽 위에 쑥 한점 떼어놓고
오뉴월 땡볕 같은 젊음을 뜸들였거늘
꽃피는 것 다 큰물 맞듯이 겪고나면
넋이야 괴로울거 하나 없는 黃土되겠네.

일곱
저승에 가서도 新房 꾸밀 줄 아는 이
참으로 몇이나 될까마는, 前生
내 꿈의 전부는 마음속 깊은 시름까지
다 주어버릴 여자를 만나는 일이었네.

열 여덟
초록 같은 거, 잠 안와 뒤척이며 앓아쌓는
잎새 같은 거, 곱게 모두어 살풀이하듯
하늘 위에 바람 위에 다 주어버리면
뉘가 사랑 때문에 또 병든다 하리오.

열 아홉
틀이 같은 초승달이 한개만 떠서
한돈이나 한돈 반쯤이면 맑게 웃을
초하루나 이튿날의 내 가난한 계집의 꿈은
긴긴 겨울밤을 뜬눈으로 새우네.

스물 하나
십오야 둥두럿이 달 뜬 날 밤에
젖물나듯 잦은 눈물로 살은 가시내.
봄풀잎 하나라도 될 것 같애
주인도 없이 아기를 낳네.

스물 둘
내 가슴속 찰거머리 같은 계집아이여.
너마저 낙엽지듯 떠나버리면
내사 잠 아니오는 가을 빛 세상을
더러는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겠다.

스물 넷
햇살도 내려오다 젖어드는 가락이 되듯
가야금 중머리나 중중머리의 散調가 되듯
서리묻은 내 계집의 다박솔 눈썹.
그 그늘은 하눌님도 알으시어 볕들리듯 하네.

스물 여섯
봄날 풀잎 햇살 쬐듯, 내 꿈은 젖어
연초록색 그늘로 덮이네.
새삼 늙어서야 쬐꼼 사랑을 알듯한
몇 송이 꽃으로 피고픈 마음 위에…….

스물 일곱
춘삼월 새살돋이하는 잎사귀처럼
밤새도록 내곁에서 뒤척이는 가시내.
그대 살결은 초록빛 향유로 젖어 있고
난 사랑 때문에 조금 앓고 있었다.

서른
꿈에서 뵈옵는 연꽃 같은 부인의 살내음과
내 아내도 똑 같을 때가 있읍니다만
꿈과 생시의 정을 주고받는 일들에서
어느 것이 참 마음인지 모르겠읍니다.

서른 둘
천년 묵은 능구렁이처럼 돋은
내 서러운 핏줄 위에는
한약 냄새가 나는 계집의 손이
죽엄과 같이 남아서 내 손맥을 짚고 있느니.

서른 셋
이승에 살아서 우리가 꿈꾸어 본거
한잎 연잎 자리 위에서 인양 참말로
모다 인연의 큰 물구비로 삼기까지는
어느 머리올 하나에라도 매듭지지 않고…….

서른 아홉
지애비 있는 계집의 손을 잡고
파계승처럼 관악산 밤길을 내려온다.
집도 아내도 십리밖 등불로 묻히고
어쩌자고 가슴은 한점 눈물도 없이 달디단가.

마흔 셋
봄되어 내 고향 산자락에 녹는 눈처럼
살아가다 살아가다 쌓인 들도
다 녹아버리게 한잔 술로나
내 몸에 舍利를 만들며 살아갈거나.


* 풍경 - 강우식

하늘이 너무 많이 보이는
대흥사 추녀 끝
바다가 너무 많이 보이는
낙산사 추녀 끝
하늘도 바다도 고색 창연한
물결이랑에서
어린 고기 한 마리
천연히 놀고 있다.
새순 돋듯한 낡은 기와의
파릇한 이끼라도 입질하는 듯……


* 타는 사랑 - 강우식

태양에 그을린 살갗이 하루나 이틀쯤 쓰려오는
팔월이면

별이 박히듯 떠오르는 여자들이 있어
아파라.

살뭉치로 와서 살뭉치로 와서
타는 사랑은
물집마다 올리브 향유나 바르며 온 밤을 뒤척이게 하고

아내 몰래
그 옛날 여자들의 이름을
죄처럼 쓰고, 때로는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지우나니

팔월이면 어이하여
살이든지, 마음이든지 이리 불타고
살아 있다는 것이

가만히 가만히 그 이름 새겨보듯
행복하기만 하냐


* 설연집 - 강우식

(한 수 )
눈은 내리면서도 내리는 줄도, 눈일 줄도 모른다.
섭섭함이 그리고, 그래서, 그렇지마는
사라아, 내마음도 그렇게 가리라. 별 하나
초롱히 씨로 받아 질 속에 넣고 싶은 여자 곁으로...

(두 수)
내 가려운 맨살등을 긁어내리는 빗금,
그대의 흰 손톱만큼한 눈송이들이 내린다.
눈안개 퍼지는 저녁이면 가슴에 구멍을 뚫고
그녀의 사랑말이냥 마구 담고 싶었다.

(세 수)
사랑하는 사람아, 눈이 풋풋한 해질녘이면
마른 솔가지 한 단쯤 져다 놓고
그대 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저 소리없는 눈발들이 그칠때까지...

(네 수)
누이 내리면 음독하듯이 한 잔 술을 혀끝에 햝는다.
마흔 다섯살의 쓸쓸한 폐선.그가
겨울 바다로 훌쩍이며 십리 밖 바닷가에 살고 있어...
오늘도 눈길을 따라 이우도 없이 갔다 왔다.

(다섯 수)
그리운 사람을 생각할때는 기억기억 눈이 내리고
외로와서 외로와서 목이 젖으며
겨울 강에 빠져 죽고 싶은 사람들에겐
백두루미로 백두루미로 눈이 내린다.


* 서정이 있어야쟤 - 강우식

경주 황성공원 데이트의 클라이막스에서
경상도 가시내의 무령왕릉을 만졌더니
살이 아파얘애, 살이 아파얘애
가시내사 가시내사 무지스럽기로
살이 아픈기사 살이 아픈기사 봄탓아이가

경상도 계집애를 만나서는 경상도 사투리로
좀 어떻게 해보려고 하니 도시 힘만 들고
땀이 나는 때에 하늘을 보니, 강군 보래이
서정이 있어야쟤, 서정이 있어야쟤
까까머리 때 읽던 木月山桃花 페이지처럼
나뭇잎들이 파르라랑, 파르라랑 흔들렸다. 그리고 또

어디선가 산새 한 마리 경상도 사투리로 울었다.


* 마라도에서 - 강우식

물빛이 하도 맑고 푸르러서
두 발을 가만히 담그어 봅니다
여기 와서 마라도도 그 그리움을
끝내 간직하며 가지 못하고
그만 주저앉고 말았듯이, 주저앉아서는
이 땅의 마지막 그리워하는 외로움이 되었듯이
내 짝사랑도 발이 시리고 외로워서
이제 그만 섬이 되고 싶습니다.


* 老人日記·16 - 강우식
鳴沙山

어떤 여배우는 예까지 와서
타클라마칸 사막의 구름을 닮은
궁둥이를 발기고
뜨겁게 누드사진을 찍었다.

생발톱이 빠지도록
타박타박 낙타걸음으로 이어져온
실크로드여, 지금은
고행도 누드사진이다.

주먹만한 다이아몬드의
꽃비가 내린다 한들 숨이 막혀서
이 땅을 다시 밟겠느냐,

모래가 운다.

모래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울음의 산을 만들고
깎아지른 절벽의 막고굴은 울음을
죄처럼 업고 산다.

모래가 우는데
사람이 어이 눈물조차 없을소냐,

눈물속에 들어가 절을 짓고
문진의 보살상 하나 잘 다듬어
마음을 누르려 했으나

마른 혓바닥으로
모래알 쓸리어 가듯 우는
저 산울음 소리로는

이세상 풀잎 하나도 적시지 못함을
나는 안다.
업보다. 그러면서도 서역 하늘 전체가
천년을 두고 운다.


* 老人日記·21 - 강우식
시래기를 삶으며

아내는 김장을 하면서
남은 채소들을 모아 엮어
아파트 베란다에 매달았다.

시래기 타래들이 20
허공에 있는 것이 신기해선지
겨울 햇살도 씨익 웃다 가고
바람도 장난꾸러기처럼
그 몸체를 마구 뒤흔들었다.

오늘은 고요히 눈이 내리고
왠지 어릴 때 어머니가 끓여 주던
시랙국 생각이 간절하여

배추잎, 무청들을
푹 삶아서 푸르게 살아난
잎새들의 겉껍질을 벗긴다.

겨울해는 내 인생처럼
짧기만 한데
나이들수록 돌아가고픈
옛날이 있다.


* 내 마지막 겨울은 - 강우식

여자보다 더 끊기 어려운 것이 술이다.
이제 문득 다시 이 몸 생각하면
삼동 내내 바람과 함께 서걱이는
처마끝 한 타래의 시래기 같을 뿐이다.

바람아, 내 만일 겨울에 죽게 된다면
마음 속 계집처럼 너를 부를 터이니
그리운 임 만나러 가는 얼음 강판에
죽은 재나 날려서 미끄름이나 막아 다오.


* 강 같은 슬픔 - 강우식

살이 불 타서 허물어져 내린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니
스무살 적 사랑했던 까뜨린의 눈동자처럼
하늘은 서럽도록 슬프게 텅텅 비었고
아아, 어쩌면 좋아
서럽도록 텅텅 빈 것이 보이는
이 가슴을 어쩌면 좋아
땅바닥에는 흥건히 적셨던 핏물도
어느새 마른 핏자국
한 번은 양지바른 땅에 꼭 묻어주고 싶었던
까뜨린의 살점 같은
낙엽 단풍
살이 불 타서 허물어져내린
이 강산의 가을은
굽이굽이 강 같은 슬픔으로 흐른다.


* - 강우식

한쪽 창에는
한 여자를 물이 되어 흐르게 녹여준
한 사내의 알몸 반신이 훤히 보이고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지)

안 보이는 창틀 밑 절벽에서는
숯 덩어리 같은
사내의 하체를 붙잡고 늘어진
여자의 절망이 춤을 추고 있다.
(인생이란 그렇기도 한 것이지)

또 한쪽 창은
문 열어둔 채 모두가 외출이다.
풍경은 없다.
하늘을 너무 닮은 바다만이
큰 몸을 자유자재로 출입하다
때로는 파랗게 기절한다.

텅 빈 것과
있는 것의
보이는 절망과
안 보이는 사물의
틈에 주저앉은

이미 창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게
밑창 드러난

그리고 끝이 없는
이 마지막 한 줄의 시와 같은
그저 아카시아꽃의
비릿한 바람 냄새만 맡는,
한 줄기 비가 느닷없이 습격해서
잎새들의
샤워 소리를 듣고 싶은....


* 고려(高麗)의 눈보라 - 강우식
- 강설(降雪)

하늘에서 땅까지
막막한 공간을 덮으며
눈이 내린다.

잴 수 없는 거리와 폭이
이 나라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흙을 일구며 성()을 쌓으며
살다 간 수천억의
영혼들…….

그들의 일생이
한점 눈송이로 응결되어
점점 이어진다.

얼었던 마음도
눈물로 풀릴 줄밖에 모르던
이웃들의

분노도 절규도 없는
이 조용한
하강(下降).

지금 천지는
그저 오랜 잠.

역사도
잠 속에 빠져든 듯한
슬픔이

하늘에서 땅까지 내리는
눈발이 되어
내 가슴을 적신다.

눈이 내릴 때,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한 송이 한 송이 떨어지는 눈꽃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그렇게 막막한 공간을 가득 수놓고 있는 눈을 이 시인은 흙을 일구며 살다간 이름 없는 백성들의 영혼으로 본다.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그들의 삶이 한 송이 눈으로 환생하여 다시 이 땅을 찾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분노할 줄도 절규할 줄도 모른 채 묵묵히 살다 간 이 땅의 평범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눈물이 눈으로 화하여 조용히 내리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다 간 그때와 마찬가지로 천지는 여전히 오랜 잠 속에 있고, 그들의 영혼은 조용히 허공을 수놓으며 땅에 내려와 서서히 녹으며 사라진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민초(民草)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시인의 마음에 다가오고 있다. 하늘로부터 땅으로 점점이 이어지는 눈의 `분노도 절규도 없는 / 이 조용한 / 하강'은 말 없는 웅변으로 시인의 마음을 울리는데 그것은 `얼었던 마음도 / 눈물로 풀릴 줄 밖에 모르던 / 이웃들의' 모습, 바로 그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제목에 들어 있는 `고려'는 고유명사로 고착시킬 필요가 없다. 고구려로 바꾸어도 좋고 조선으로 대치시켜 놓아도 그만이다. 이때의 `고려'는 그냥 과어일 뿐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얼었던 마음도 / 눈물로 풀릴 줄 밖에 모르던 / 이웃들의' 순박하며 정에 넘치는 마음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마음들만이 이 땅에 진정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시인은 가슴을 적시면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랴. 이 시에서는 삶의 슬픔이랄까 잔잔한 허무감도 느낄 수 있다. [해설: 조남현]


* 白雲寺 딸기밭 - 강우식

푸성귀나 산채를
제아무리 즐겨 먹는 중질이라 하지만
산사에 딸기밭이 있는 것은
좀 야릇하다.

봄밤에는
경 읽기도 힘들지만
자꾸 여자 생각하는 下焦 간수하기도
여간 일 아니어서

잘 익은 딸기알들을 보노라면
환속한 소설가 金聖東
절에 들던 나이 또래의 스님들이
탱탱해진 불알 두 쪽을
쑥쑥 뽑아서는 내던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라. 가랭이를 알맞춤 벌리고
딸기밭에 와서는
뭐 하드키
지긋이 내리누르는 구름.

어떤 것들은
아이스크림 핥는 아이들의
혓바닥처럼 낼름대고 있어서
딸기밭에서
나는 그만 혼절하고 마느니.


* 우동을 먹으며 - 강우식

염소의 입을 가진 항구가 비속에서 애애-,,애애- 울고 있다. 바다가 비에 젖는다. 떠난 남자의 수염이 하얗게 바래져 빗줄기로 떨어진다. 갑자기 살갗이 감정인양 얼룩진다. 파도는 가슴에서 평소보다 4미터나 높다. 4층 아파트 때문이다. 창문을 열어놓고 비를 보며 바다를 보며 우동을 한입한입 씹는다. 비의 줄기도 추억의 실낱도 끊어져 나간다. 씹는 입속에 바다의 한 쪽이 물컹 터진다. 마지막 슬픔이듯 후르르륵, 후르후르륵 바다를 들이켠다.


* 타는 사랑은 - 강우식

태양에 그을린 살갗이
하루나 이틀쯤 쓰려오는

팔월이면 별이 박히듯
떠오르는 여자들이 있어
아파라.

살뭉치로 살뭉치로 와서
타는 사랑은
물집이 생기는 아픔으로 일어 올리브 향유나 바르며
온 밤 뒤척이게 하고

아내 몰래 창가에서
그 옛날 여자들의 이름을 죄처럼 쓰고
어떤 때는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지우나니,

팔월이면 어이하여 살이든지,
마음이든지
이리 불타고
살아있다는 것이
가만히 가만히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리듯
행복하기만 하냐.


* 어머니의 물감상자 - 강우식

어머니는 시장에서 물감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감장사를 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온갖 색깔이 다 모여 있는 물감상자를 앞에 놓고 진달래꽃빛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진달래 꽃물을, 연초록 잎새들처럼 가슴에 싱그러운 그리움을 담고 싶은 이들에게는 초록꽃물을, 시집갈 나이의 처녀들에게는 쪽두리 모양의 노란 국화꽃물을 꿈을 나눠주듯이 물감봉지에 싸서 주었습니다. 눈빛처럼 흰 맑고 고움 마음씨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종일 물감장사를 하다보면 콧물마저도 무지개빛이 되는 많은 날들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동저고리 입히는 마음으로 나를 키우기 위해 물감장사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이 지상에 아니 계십니다. 물감상자 속의 물감들이 놓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나에게는 물감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만 가슴에 물들이라고 물감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추운 겨울 코끝이 얼도록 좌판을 펴 물감장사를 했다. 코끝을 스치는 콧물이 무지개빛이 되고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있는 아들은 배가 고프다. 설움을 이기려고 딴전을 피우기도 한다. 물감장사로 생계를 꾸린 한 시절은 아들의 미래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버이가 되었건만 시인은 여전히 어머니의 길을 생각한다. 어른이 되면 다 고아가 된다.


* 탈춤고 - 강우식

서시

꽃 하나로 피워 보내는
세월이야
한줌 잿더미로 사그러지리니
천년을 산 늙은 나무의
푸르른 운직임같이
산대에 올라 춤추리라.

< 하나>

잠재우다 잠재우다
더러는
잠깨어보면서
사람이 살다 가는
저 세상에도
바다만큼한 아픔은 있어라.
마음 쓰는 그릇이야
크고 작은 건
내사 모르지마는
이 땅에도 바다만큼 출렁이는
주문을 욀 줄 아는 이
있어라.
분바른 얼굴의 애사당같이
즈믄 봄날에 흐느끼지 않은 이
몇이오며
제삿날 차례지내듯
제 할 일 다스리고 산 이
몇이나 되리
죽어도
이 세상 한 말씀 지킬 줄 아는 이
있어라.

< >

한칸 집도 없이
사당년의 피를 받은
한 생명이 태어난
새벽에
조그마한 꽃이 피기 시작한
아픔을 들으며
쌍놈의 고전
춘향전의 한 대목을 읽었다.
그대 생애는
사랑에 맡겨지고
그대의
영원함은
죽음 속에 있으리.
신들만이 아는 새로운
시간이
모든 이웃들과 함께 떠나가네.
취발이도 왜장녀도
마당발이도
또 내가 받은
햇볕과
풀잎마저도
모든 이웃들과 함께 떠나가네.

< >

누가 유랑이라 하리.
내가 살고
늬가 죽고....
살아가면서 살아가면서
깨고 나면 우리는
한줄만 탔느니.
바람을
두 손으로 가누고
무우장다리 꽃밭 옆에서나
포장을 친 잔치집 마당께에서
판을 벌이면
집이었거니.
사람들아, 사람들아
큰 상덩어리로 무너지는
한이 있으면
큰 산덩어리 같은
장을 쳐서
흐트려주고
그대 가슴에
못다 핀 꽃이 있으면
가만히 가만히
얘기해다오.
창 잘하고
꽃 잘 피우는
남사당을 내보내마.
고을마다
장을 두고 가느니
누가
유랑이라 가느니.

< >

탈난 것 있으면
춤으로 다스려 가리.

< 다섯>

그러나 어이하리.
더벅머리 남사당의
괴춤에 흐르는
땀이야
어이하리.
동해나 울산 바닷가에선
제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여
퍼렇게 멍들도록
등을 비비대는 해일을 보았거니.
허구헌 날
연약한 풀잎에도 깃든
괴로움을 보았거니.
어느 깊은 물의 줄기에서
거듭 태어난대도
남도의 봉건이여.
어느 계집이
나에게 눈을 맞추리.
그저 외딴 섬처럼
파랗게 질려 있거나
천겹 만만겹으로 찢기는
파도의 아픔
비늘 돋친 한마리 배암이나 되어
그저 꿈틀댈 수밖에 없는
이 서러운 피를
어이하리.

< 여섯>

한잔 술로서 취하고 싶은 건
어이 꽃두고 태우는
가슴 뿐이랴.
동지나 섣달 날새우듯
그렇게
세월을 보내왔거니.
화냥기 있는 계집의 몸매처럼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 사이
각시방 영창마다
달이사 떠서
몸도 마음도 어지러이 떠다니다
산덩어리 같은 괴로움으로
밀물짓거든
취발이, 취발이여
어느 꿈길에 가더라도
들려오도록
한순으로 한순으로
날라릴 불어라.

< 일곱>

도화 도화
도화살이 끼인 가슴은
육자배기로 풀어보리라.
내 가슴 속 넓은 벌판에 심어진
꽃나무에 피는
수억만개의
복사꽃.
크기로 치면
처녀애들 젖꼭지만큼한
내 전생으로는 지울 수 없는
마약이여.
저승에 가서나
어떨지 몰라.
이녘의 밤일랑 다 자고 깨고 나야
어떨지 몰라.
육자배기로 풀어보리라.
무릎을 치며
내 도화살 낀
사랑을 풀어보리라.

< 여덟>

줄타기하듯
딴 계집에게 정주는
서방 만난 거
이것 다 타고난 팔자거니.
잘 체념하던 가슴의
아내도
다스릴 수 없는 게 있어라.몇 억만자의 깊이에서 떨어지는
햇볕을 불러들이고
뜨거운 바람으로 문질러가며
어드런 계집도 볼 수 없는 데서
만들어지던
탈이 있어라.
이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피가 있어라.

< 아홉>

탈을 만들다 지쳐
잠든 밤이면
꿈결에서 이빨을 간다.
이 탈만 만들면 보자.
뜬 눈으로는 못갈던
이빨을 간다.
잠자면서 가는
이빨소리
이젠 괜찮겠지.
마음놓고, 마음놓고
정신병원에 갇힌 놈씨 되어
히히대며
제 정신이 아니게
이빨을 간다.
양반집 담을 헐어 뜯는
쥐소리를 내며
이빨을 간다.
탈을 만들다 잠든 밤에
이빨도 다 갈리고
붉은 잇몸만 남아
웃는 녀석을
꿈 속에 본다.
그런 녀석을
꿈의 현몽으로나 알아
탈로써 만든다.

< >

스무명쯤의
첩을
거느리지 않은 이 없는
이씨 왕조여.
그건 다 시녀라는 건가.
밤마다
연등에 불밝혀가며
게집을 불러 들이던
절터여.
양반에게
아내를 빼앗긴
머슴의
말 아니라도
세끼 밥줄에 명을 잇는
세상은
구중궁궐
높드란 돌담 같다만,
캄캄한 가슴 갖고도
한바탕 웃고 싶구나.
눈끔적이처럼
먹중처럼
옴처럼
어느 탈이나
하나 쓰고
눈물 나는 때는
질탕하게 웃어보고 싶구나.

< 열 하나>

육신도 제 뜻대로
못 죽는
세상이지만
말음만은 남아서
저승엘 가
아프게 꽃져 보고 싶으이.
처녀 귀신도
목매달지 않는다는
남사당의 댕기 옷고름.
열아홉 씨알 같은
사랑을 묻어버리면
시뻘건 혓바닥도 가로 누워서
이승의 숱한 모래알
하나 씹지 아니하고
뼈다귀도 뼈다귀도
그대로 있는
생피에 생살로
아직도 있는
가을 산에 올라
목이나 놓아가며
울고 싶으이.

< 열 둘>

탈을 잡지 말라고
내리치는 태장으로
이 천한 살점을 달라 하면
주어 버리고
무슨
탈이 그렇게도 많냐고
장죽을 문 서슬 푸른
호령 앞에서도
이 세상 그저 무심코련 듯
지나치는 바람소리로
웃어버리고
탈 하나때문에
계집을 빼았기고, 자식을 잃어도
그저 허허 웃어버리고
탈이야 늬놈들이 잡는
.
그것도 말로는 못하고
몸짓으로만
그저 시늉해 버리고
탈 하나 때문에
그렇게 살다 간
탈 많은 사람들....

< 열 셋>

탈들은 다 어디 갔을까.
한도 없이
산다는 게 겁이 나네.
뜬 눈으로
밤새운다 해도
대웅전 그 넓은 뜨락도
여자도 보이는 게
하나 없고
마음에 짐될 것도 없이
세월을 가는
끝없는 바람소리뿐이다.
내 귀신의
뒷바래질이나 하듯이
이어온 가락뿐이다.
황촛불처럼
찌르르 녹아지던
구곡간장.
목 조아리며 살아온
이 세상을
내 대신 침뱉어 줄
탈들은 다 어디 갔을까

-=-=-

* 어머니의 물감상자 - 뉴스메이커

문학은 다양한 삶을 표현하되 구체성을 가져야 한다. 구체성을 갖지 못한 작
품은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다시말해 문학이 인간의 삶과 유리된 채 공허
한 울림으로 접근할 때 그 문학은 죽은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은 또한 구체성의 실현만으로는 성공할 수가 없다.여기에는 필연
적으로 언어의 탄력성이 있어야 한다.언어의 탄력성이란 삶의 구체성을 실감있
게 매개하고 미화해주는 개연성 있는 문학적 상상력이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시의 경우 시인의 상상력은 절대적이다. 하나의 사물(
것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을 대할 때 시인의 상상력은 객체인 사물과 하나가
되어야만 상호 긴밀한 주고 받음의 작용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살아있는 현실의
가능태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강우식의 어머니의 물감상자(창작과 비평사 간)는 살아 있는 시
편으로 묶여진 시집이다.

이 시집은 제1부에서 `대륙에서'라는 중국 기행시를, 2부에서는 현대 사회
의 모순적 실체를 고발한 `유령',3부에서는 우리 삶의 지혜를 불교적 성찰
로 담아내는 `불시잡변'(佛詩雜辯)으로 나누어져 있다.

`12천의 대륙인들이 황토흙 같은 그 가진 싯누런 살결과 황사로 팍팍해진
가슴과 막막함들을 꿀렁꿀렁 짓이겨서는 울며 지나가는 것들을 보았다.그 울음
의 길이가 무려 6km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황하 강변에 서다)

무력해지기 쉬운 기행시에 살아 있는 민중의 삶을 불어넣음으로써 이 시는
살아 있는 모습을 띠게 된다. 시인의 상상력과 중국인들의 삶을 하나로 일치시
킴으로써 주고 받음의 작용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곧 우리에게 감명으로 다가온 다.

황하가 흐르는 것을 울음의 흐름으로 상상하는 것은 황하와 중국인들 그리고
시인이 하나로 일치되지 않았을 때는 불가능한 시적 기교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시적 기교가 바로 살아있는 현실의 가능태인 것이다.

`어려서 잠자리를 잡아 본/어른들은 안다./잠자리 두 날개를 잡은 손가락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절대권력이 거기에는 있었다.// 어둠이 새벽으로
가는 세시 무렵에/유령의 무리가/신혼부부의 방을 침입했다.//'(가정파괴범)

여기서 가정파괴범은 절대권력을 가진 유령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유령의 모습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이다. 보이지 않는 유령을 시인
은 시적 상상력으로 우리에게 실체를 드러내는 존재로 탈바꿈시킨다.그래서 사
람들은 더욱 두렵다.보이지 않는 유령은 경외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보이는 유
령의 모습은 어둠의 상징태이다.

잠자리의 두 날개를 잡은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유령인 것처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큰손이나 복지원
그후의 문제도 결국 유령에게서 나온다.`유령'이라는 존재는 시인이 사회적 모
순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1부에서 사물에 상상력을 도입, 구체성을 획득했다면 제2부에서는 시인의
상상력에 사건을 도입, 구체성을 찾아낸다. 구체성을 실현의 방법상 차이가 있
을 뿐 시의 생명인 시적 상상력 측면에서는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독자에게 감명을 주는 이유이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시적 기교는 제3`불시잡변'(佛詩雜辯)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서 시인이 시도한 작업 중 하나는 죽어 있는 무생물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전등사 추녀밑 목각나녀상을 움직이게 하여 `비데가 없던 시
절에/뒷물대야로 황해 바닷물을 퍼다가/밑을 씻'게 하여 `수억천만 겹의 물결'
이 그녀의 밑을 씻게 하고, `아니면 은밀하고 깊은/그녀의 사처를 보았다고 춤
'게 만든다. 다른 시편들에서 보이는 달관의 시적 기교도 바로 상상력을 현
실로 이끌어낸 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강우식의 시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반성이라
는 감정의 자극이다. 그 의도는 어머니의 물감상자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아가신 어머니를 회고하는 물감상자에 몰입되고 그 물감의 갖가지 색채를 통해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만 가슴에 물들'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성균관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대문학>[사행시초](1966)를 추천받아 문단활동을 시작한 그는 서민들의 한을 질펀하고 끈질긴 맛으로 시에 토속적인 색감을 잘 살리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하동인회> 동인이다.

사행시초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방은 하나의 사과 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 속
누가 그 순수한 외계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물구비를 넘어나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팍에 새삼 피어 오르는 쓰린 눈물이여.

()

계집애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 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다섯)

낙엽은, 한 여자가 생리일에 꾸겨버린 색종이처럼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가을 날
무덤 속같이 생각이 깊어버린 여자 곁에서
사랑이여, 우리가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타는 사랑은

 

태양에 끄을린 살갗이
하루나 이틀쯤 쓰려오는
팔월이면 별이 박히듯
떠오르는 여자들이 있어
아파라

살뭉치로 살뭉치로 와서
타는 사랑은
물집이 생기는 아픔으로 일어
올리브 향유나 바르며
온밤을 뒤척이게 하고

아내 몰래 창가에서
그 옛날 여자들의 이름을 죄처럼 쓰고
어떤 때는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지우나니.

팔월이면 어이하여 살이든지,
마음이든지
이리 불타고

살아 있다는 것이
가만히 가만히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리듯
행복하기만 하냐.-설연집(雪戀集)

계간문예시인선 127 강우식 시집 <가을 인생> 출간

 

 

 

이 짧은 시에 대한 내 작업은 문자나 기호로 시를 표현한 극도의 실험적인 것이 아닌 최소한 시의 규격을 살린 면에 신경을 쓴 보수적인 시창작 과정이다. 그러면서도 여기 실은 짧은 시들은 좀 씀바귀 냄새를 풍길지 몰라도 경쾌한 페이소스다. 부담이 없다. 마치 조깅으로 공원을 두루 한 바퀴 돈 것 같다. 이제 그 한 바퀴 인생도 거의 다 돌았다.

 

 

한평생 세월도 지나고 보니 찰나다. 하지만 길게 사설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말이 길면 시가 아니다. 특히 늙은이의 긴 소리는 잔소리가 된다. 인생도 내 시처럼 간결하게 살다 가려 했는데 여기까지 온 길은 그저 부끄럽다. 바람이 분다. 쓸쓸하다. 한 잎 낙엽 지는 가을 인생을 홀홀히 떠나야겠다.

강우식 <여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