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정령, 상징 혹은 행간의 부름
―정령의 시세계
손현숙|시인
정령의 시들은 따뜻한 상징과 감각의 향연이다. 그가 혹은 그녀가(필자는 정령 시인을 만난 적이 없다) 불러오는 상징의 대상들은 모두 삶과 연관되어 있는 듯하지만, 그 행간을 따라가다 보면 삶도 죽음도 아닌 중간의 어느 부분에서 아주 낯선 시선으로 대상을 시각화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대상을 바라보는 그 행간에는 연민이나 자기애적인 집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영혼의 대답을 기다리는 공간의 모습처럼 꽉 차있지만, 또 텅 빈 것처럼 담담하다. 그것은 마치 아주 낯선 정신의 기능이나 작업처럼 감각을 동원한다. 그 말을 뒤집어보면 지적이고 정서적인 정령의 시들은 경계 저쪽을 말하면서도 그 행간에서는 반드시 삶, 즉 지금 여기를 역설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것은 행간을 초월하는 영혼의 대상들이 유령이나 모습 없는 모습으로 현현 하는 출몰의 형태가 아니라, 살아있는 분명한 모습으로 도래하여 오늘을 직접 간섭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령의 시들은 허황되지도 않고 애매나 모호함의 미로를 벗어나서, 그러나 삶의 힘찬 모습을 가감 없이 그대로 나타내어 보여준다. 때로는 알레고리의 형태로, 때로는 대상의 모습을 깨끗하게 지우면서 상징으로 모습의 변화를 시도한다. 그것이 이번 시집 속에서 정령이 꿈꾸는 새로운 문자 나라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의미를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그는 결국 시는 그 무엇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시도에서 벗어나서 그 무엇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정령의 시집에서 행간을 채워가는 침묵의 대상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그가 본질적으로 꿈꾸는 문학의 세계, 그것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사랑하고 감각하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 적는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삶의 경지에 오른 담담한 시선이거나 혹은 지난한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의 정신적인 고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중원에서 협객은 이마에 태양혈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 어쩌면 정령이 이번 시집을 통하여 넌지시 던지는 전언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는 ‘시선으로 불러오는 대상’들과 ‘꽃이라 이름 부른 그 무엇들’, 그리고 ‘말맛’ 그리고 ‘입담을 따라가는 따뜻한 시선’을 상징과 행간의 알레고리를 불러와서 읽어볼 것이다.
#시선으로 불러오는 대상들
끈 떨어진 커튼이 펄럭인다.
열 받은 전깃줄에 새들이 비비거린다.
푸른 바람이 마르도록 울음소리가 탄다.
놀란 나뭇잎이 가로등을 깨운다.
적막과 밝음 사이에 어쩌다 와 있다.
시간이 오슬오슬 흘러간다.
빛의 그림자가 고양이가 되어 웅크리고 있다.
끈 떨어진 커튼이 문득 새를 바라본다.
전깃줄을 넘다가 바람이 새들을 건드렸다.
태양의 비명이 낭자하다.
목젖이 타들어가고 가로등은 나뭇잎을 재운다.
어둠과 고요 사이에 어쩌다 와 있다.
―「어쩌다」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말하는 위치에 서있기 보다는 차라리 바라보는 침묵의 자리에서 대상을 포착한다. 대상을 따라가는 시선은 어떤 설명이나 대상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멈춘 채, 그 무엇의 가능성들을 보여주는 것에 골몰한다. 시의 정황을 만드는 기표들은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그것은 누구나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커튼, 전깃줄, 나뭇잎, 가로등으로 특별한 장치의 무엇이 아니다. 화자의 시선이 멈추는 것은 뜻밖에도 불완전한 형태의 모습들이다. 화자는 그 불안전한 것들에서 완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만 시선으로 따라간다. 어떤 설명이나 진술을 거부한 채 한 폭의 수묵화처럼 상황을 따라가는 시선은 집요해서 차라리 담담하다. 그러나 시의 제목이 보여주는 「어쩌다」의 역설들은 연을 사이에 두고 커다란 반전을 시도한다. 첫 연에서 포착된 기표의 대상들은 다소 불안전해 보이는 것들로 커튼이 펄럭이는데, 그것은 끈이 떨어져 있고. 새들이 비비거리는데, 그것 또한 열을 받아서 고통을 동반하는 전깃줄이다. “푸른 바람이 마르도록 울음소리가 탄다.” 의 의문의 자리는 다음 행에 이어지는 “놀란 나뭇잎이 가로등을 깨운다.”로 가로등의 정체를 살아있는 생명으로 치환 발화 하면서, 바로 앞 행의 울음과 상치되는 효과를 보여준다. 그것은 “울음소리”가 “깨운다”로의 여정을 어둠과 밝음의 대치로 청각, 즉 감각을 동원하여 “적막과 밝음의 사이”를 장면화 한다. 그런데 두 연으로 이루어진 위의 시는 첫 연만으로는 인과의 관계가 분명하지는 않다. 다음 연으로 이어지는 상황의 전개들이 왜, 어떻게 그런 정황이 벌어진 것인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상황의 부연 설명이나 진술을 철저히 거부한 시의 장면들은 커튼이 펄럭이는 이유와 새가 전깃줄에 앉아서 우는 필연과 저녁이 와서 가로등이 켜지면서 나뭇잎의 모습이 사라지는 이유를 바람과 시간의 흐름 위에 가만히 얹어둔다. 화자는 그것을 조건과 반사가 무화되는, 아름답지만 무용한 자연의 이치임을 묘파한다. 그것들은 손으로는 잡을 수도 잡히지도 않는 빛과 어둠으로 시간의 흐름이고, 그 무위하게 흘러가는 흐름 속에서 빛의 내부인 어둠으로 인해 “빛의 그림자가 고양이가 되어 웅크리고 있”기도 하고 “커튼이 문득 새를 바라” 보기도 한다. 형태가 없는 바람은 전깃줄에 앉아있는 새를 만나면서 새들의 울음을 불러내기도 하고, 그 우연한, 어쩌다 만나게 된 인과의 법칙들은 결국 시간의 흐름 위에서 태양의 밝음을 침묵하는 어둠 속으로 끌어들인다. 화자가 발화하는 마지막 행의 “어둠과 고요 사이” 라는 커다란 낙차 또한 인간의 힘으로는 간파가 되지 않는 “어쩌다”라는 언사는 화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폭 넓은 시선과도 맥을 함께 한다.
시간이 꽃잠을 자고 그림자가 오수를 낳으면 사아삭사아삭, 개미가 빵조각을 앞발로 굴리며 간다.
바람이 태몽을 꾸고 공기가 몽정을 하면 어기적어기적, 달팽이가 더듬이를 세우며 돌아본다.
고요가 만든 달팽이관을 따라 고막이 거미줄을 치면 뒤적뒤적, 노인이 담배쌈지 뒤지며 담뱃불을 찾고,
한숨이 지나간 폭풍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소리 없는 기적을 울리면 부스럭부스럭, 신혼부부가 옆방에서 남침을 간다.
냇물이 마르고 꽃이 꽃잎 속으로 노을을 거두어들이면 안으로안으로, 지친 몸뚱이가 꽁꽁 얼어붙는다.
사무친 사람들이 적요의 얼굴로 생생해진다.
―「적요」 전문
시의 정황상 화자의 시선은 어리고 여린 것들과 강자 보다는 약한 것들 앞에서 정지한다. 바람은 속성상 활기차게 활동을 하는 것으로 어떤 모습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도구로 묘사가 되기 일쑤인데, 화자는 바람에 관하여 시간도 잠을 재우는 “시간이 꽃잠을 자고”라는 “고요” 앞을 무상으로 서성거리는 존재로 치환 발화한다. 그러다 뜻밖에도 포착된 장면은 아주 작고 미미한 “개미가 빵조각을 앞발로 굴리며”가는 생명의 활발성을 발견한다. 뿐만이 아니라, 시간 앞에서 무력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고요가 만든 달팽이관을 따라 고막이 거미줄을 치면”의 노인에 대해서도 의외의 활동적인 모습인 “담배쌈지 뒤지며 담뱃불을 찾고,”로 양지 보다는 음지쪽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움직임에 마음을 기울인다. 3연의 “꽃이 꽃잎 속으로 노을을 거두어들이면”이라는 아름다운 발화 역시 2연의 “폭풍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소리 없는 기적”과도 한 맥을 잇는다. 마지막 연에서 언표 하는 “사무친 사람들”의 얼굴에서 명사격인 “적요”를 발견하는 화자는 바람, 즉 활발한 무엇이 지나간 자리에서 바라보는 대상들에 관하여 한없는 연민의 심정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위의 시는 화자, 즉 시인의 시선 안에서 ‘적요’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자리에서 상징 발화하는 역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빛깔에 끌리기로 하자 아침에는
주홍빛의 능소화 노란 금계국 붉디붉은 찔레
빙빙빙 후리며 돌다보니 겨드랑이가 결린다.
날갯죽지가 뻑뻑하다.
향기를 따르기로 하자 저녁에는
붉은 장미 바라보다가 코가 따갑다.
목련꽃 핀 자리에는 아련한 어머니의 냄새
고상하다는 튤립 옆에서 어깨를 편다.
옆집 누이 치마 속이 궁금해지는 명자꽃 정강이가 가렵다.
달개비꽃길 따라 맴맴 돌다가
보르르 날개를 접고 숨을 고른다.
―「자자, 나비야」 전문
이번 정령의 시집 속에는 대상을 타자화 하여 정황을 묘파하는 시들 보다는, 타자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서 경계를 지우는 주체의 시들이 종종 눈에 뜨인다. “비튼 몸, 꿈속으로 걸어가고 달 속으로 달려가고 별 속으로 뛰어가”(65쪽), “능소화가 꽃잎을 동그랗게 오므리기 전에 보았지.”(76쪽), “그저 먹먹한 가슴/반짝이는 별이 토닥이는데도 가는 손 내밀며 하 속수무책”(27쪽)처럼 대상에 대한 무엇의 의미부여를 중지한 체, 대상 속으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가는 경계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위의 시에서도 나비가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어서 세상을 주유천하 한다. 또한 시의 주체가 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시간의 층위도 무화시킨다. 예를 들면 “주홍빛의 능소화 노란 금계국 붉디붉은 찔레”가 피고 지는 시간의 층위는 봄과 여름의 의미조차 지워버린다. 그렇게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나비는 어딘가에서 쉬어가야 하는데, 나비는 오롯이 마음의 결을 따라 “빛깔에 끌리기로 하자” 혹은 “향기를 따르기로 하자”처럼 마음이 허락하는 적당한 처소에서 자거나 혹은 쉬어가기로 한다. 시의 장면은 나비가 머무는 곳에서의 상념을 불러오기도 하는데, 나비 주체는 “붉은 장미 바라보다가 코가 따갑”기도 하고. “목련꽃 핀 자리에는 아련한 어머니의 냄새”를 맡기도 하면서 “명자꽃 정강이가 가렵.”기도 하다. 이는 정령의 이번 시집에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촉각과 후각을 동원하는 감각의 향연이기도 하다. 더불어 방향이나 목적을 갖지 않고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날아오르는 나비의 모습은 시인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방랑벽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유의지를 갖는 예술가, 시인 본연의 자태이기도 하다.
#꽃이라 이름 부른 그 무엇들
꽃이 피지 않았다면, 가로 누워 일자로 내려오는 빗물에 흠씬 젖다가 오목한 눈으로 아래로만 보다가 어느 밤 검은 날개를 펼치고 어두운 세상을 곤두박질치다가 깊은 바다에서 낙조처럼 잠영을 하고 있을 거였다
꽃이 핀 후, 처진 내 입이 동그라지고 오물오물 아기새들처럼 벌어진다는 게 이슬이 아롱지고 바람이 재잘대는 소리에 내 눈이 반짝인다는 게 붉은 이사빛*에 매일매일 내 몸이 흔들린다는 게 다 꽃, 꽃이기에 꽃이기로.
* 이사빛 : 이른 아침에 뜨는 따사로운 햇빛이라는 순 우리말.
―「다 꽃」 전문
위의 시에서 보여주는 장면은 두 가지의 형태로 드러난다. 꽃이 피기 전과 그 후로 나뉘면서 화자의 내면 풍경 또한 극명하게 갈린다. 그뿐만이 아니라 꽃이 피기 전의 상황과 꽃이 피고 나서의 상황은 정과 동으로 나뉘면서 심경의 변화를 보여준다. 위의 시에서 직접 발화하는 “꽃이 피지 않았다면,”과 “꽃이 핀 후,”는 제목이 표상하는 「다 꽃」이라는 상징발화의 의미망 속에서 마음의 무늬가 문자로 묘파가 된다. 자, 그럼 자세히 뜯어읽어보기로 한다. 화자는 지금 화자로 분한 시인의 내면을 세세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꽃피기 전의 심경이란, “빗물에 흠씬 젖”는 것이고, “어두운 세상을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절망적인 상황은 “깊은 바다에서 낙조처럼 잠영을 하고 있을 거였다”로 매우 비관적인 정황을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 문장을 보면 과거형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갈 것을 예견하는 화자의 입장을 시간의 담론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위의 시는 연 가름이 아닌 행 가름의 장시 형태를 유지한다. 그것은 아마도 꽃의 서사에 관한 이야기일 터, 꽃의 일생은 시작과 끝이 결국은 맞물려 있다는 것과 그것은 인간 실존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 계속 시를 뜯어읽어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화자가 발화하는 “꽃이 핀 후”에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마침표 없이 장형의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의의 시에서는 꽃의 사건이란, “입이 동그라지고 오물오물 아기새들처럼 벌어”지는 신생의 사건이고 “바람이 재잘대는 소리에 내 눈이 반짝” 뜨이는 시작의 의미이면서 따사로운 햇빛에 “붉은 이사빛에 매일매일 내 몸이 흔들린다는” 생성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쯤 되면 시의 제목인 「다 꽃」의 정황이 궁금해지는데. 화자가 발화하는 ‘다 꽃’이란 의미 상징 속에는 세상의 희비가 모두 꽃으로 인하여 일어나거나 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를 다시 한 번 더 따져서 뒤집어 읽어보면 꽃의 서사는 사랑하는 대상으로도 혹은 화자, 즉 시인이 기대었던 그 모든 무엇들로 치환하여 읽어도 무방한 개방형 장형의 서정시로 읽힌다.
상복 위에 투둑 하얀 목련이 피었다
겉저고리 밖으로 상주 대면할 때마다 피는 것을
옷섶에 뽀얀 젖무덤, 목련처럼 매무새가 열렸다
가는 길조차 목련 피우고 가는 저 야속한 사람
저 사람이 생전에 잇몸 하얗게 웃더니
삼년 병수발 목련처럼 웃으라며 피었다
―「백목련」 전문
시의 정황상 장면은 딱 한 장면이다. 화자는 상가에서 벌어진 단 하나의 장면으로 산자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까지 유추한다. 둘째 연의 마지막 행에서 발화하는 “삼년 병수발 목련처럼 웃으라며 피었다”의 언사는 첫 연의 셋째 행 “목련처럼 매무새가 열렸다”의 상황을 설명 없이도 충분히 이해를 돕는다. 백목련이라는 하얗고 소담스러운 봄꽃의 이미지는 “옷섶에 뽀얀 젖무덤”으로 젖무덤과 백목련의 알레고리를 성립시킨다. 첫 행에서 직접 발화하는 “상복 위에 투둑 하얀 목련이 피었다”처럼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상복 입은 누구는 여기 주검으로 누워있는 어떤 이의 병수발을 정성껏 들었던 인물이다. 그것은 마치 죽은 자가 살아서 신세를 진 사람에게 마지막 선물로 백목련을 주고 가듯, “목련처럼 웃으라며 피었다”로 산자와 죽은 자 사이의 매개자로 삶과 죽음 또한 필연의 한 사건으로 의미발화 한다.
# 말맛, 입담을 따라가는 따뜻한 시선
창밖 햇살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꾸벅꾸벅 졸아요
볼 빨간 사과가 과묵한 사과를 오매불망 기다려요
사과에 독이 들었는지 벌레가 들었는지 베어물기 전에는
이렇다 저렇다 볼 빨간 사과도 과묵한 사과도 잘 몰라요
이름만 사과인 사과도 사과를 찾아와 사과를 내밀어요
물망초를 수놓은 조각보에 사과가 앉아 사과를 기다려요
사과들이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따라 살살 걸어와요
사과가 헤벌쭉 인사를 하면 햇살은 더 꾸벅꾸벅 졸아요
―「사과를 기다리는 사과」 전문
세상에 찢어발겨도 시원찮을 자식 버린 매정한 노랑호박도, 천하에 빌어먹을 노모와 불구인 형을 죽인 청호박도, 온 우주에 존재하는 썩어빠진 애호박에게도 귀에 대고 귓속말로 와구와구 씹어댄다. 이런, 가죽을 홀라당 벗겨서 하이애나에게 던져주고 싶은 십팔색크레파스로 그린 십장생신발껍데기야! 호박씨 까자.
―「호박씨를 까다」 부분
이번 정령의 시집 속에는 “상복 위에 투둑”(74쪽), “가막마루가 드르륵”(76쪽), “잔가지 끝에 기대어 앵앵 운다고”(86쪽)와 “와구와구 씹어댄다.(43쪽)”, “가죽을 홀라당 벗겨서”처럼 말맛을 상징하는 의성과 의태어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는 정령이 음성언어에 익숙하다는 증명일 것이고, 이를 증명이나 하듯이 위의 두 시편들은 시어가 갖는 의미나 시도를 그만두고 직접적인 음성발화의 방식을 선택한다. 이는 정령의 시작 태도나 성정과도 상통하는 것일 터인데, 이는 시인이 불의와 맞서는 방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위의 「사과를 기다리는 사과」에서는 사과의 사전적 의미인 사과 즉,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이름만 사과인 사과도 사과를 찾아와 사과를 내밀어요”의 사과와 사과나무 열매인“볼 빨간 사과”인 생물학적인 사과를 알레고리로 엮어서 한 편의 시를 구사한다. 위의 시가 발화하는 사과는, 사과를 하러오는 사과와 사과를 받고자 하는 사과로 나누어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뭔지 탐탁찮은 사과의 태도에 사과를 받는 쪽도 사과를 하는 쪽도 서로 명쾌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받고자 하는 사과는 “물망초를 수놓은 조각보에 사과가 앉아 사과”를 기다린다. 이는 시인으로 분한 화자가 명명백백 시비를 가리겠다는 것이 아니고, 종성이 사라진 ‘사과’라는 열린 음성 속에서 감각되어지는 소리문자와 사과나무 열매인 사과의 이름과 태에서 얻어지는 말맛의 입담을 따라가는 정황이다. 하긴 사과를 받으면 뭐하고 또 못 받으면 어떠리. 다음의 「호박씨를 까다」에서 화자는 더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시의 장면은 화자가 “자식 버린 매정한” 누군가를 향하여 혹은 “노모와 불구인 형을 죽인” 누군가를 향하여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을 언어화 한다. 시에서 발화하는 “십팔색크레파스로 그린 십장생신발껍데기야! 호박씨 까자.”와 같은 세상을 향한 분노의 표출은 청자 혹은 독자의 입장에서 대리만족 비슷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말맛과 함께 정령의 입담을 눈치채게도 한다.
아침나절이 뽀얀 아지랑이다
염전에 소금꽃이 흐드러졌다
밤새 저러고 질펀히도 노닐다
젖으면 벗어야지요~ 냅둬 마르게~ 옷이 젖으면 찝찝하잖아요~ 마르지모~ 요도 젖었잖아요~ 아니 요기만 젖었어~ 어서 갈아 입어요~ 괜찮아 말라 마르지모~ 그러게요 말라 마르지모 그렇지요
―「말라 마르지모―치매입담·1」 전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발화하는 ‘치매입담’이라는 시편들은 치매 환자가 발화하는 현장의 언어들을 화자가 시말로 치환하여 받아쓴 시편들이다. 치매 당사자와 환자를 돌보는 화자의 대화 혹은 묘사로 그려지는 치매입담의 시편들은 고통의 극적인 순간 속에서도 유머와 위트를 잊지 않는 내공을 보여준다. 시인, 즉 시 속의 화자는 아마도 “그만해요 아버지 버지니아 풍년화가 마른 잎사귀로 살살 흔들어 말린다 ”(70쪽)와 “엄마 엉덩이 올려 보지요”(69쪽)의 발화로 미루어보아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의 수발을 다 들었던 듯하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습과 소리들을 입담으로 구사하는 위의 시편은 밤새 이부자리에 오줌을 싼 치매 노모와의 대화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고통이면 고통이랄 수도 있는 극한 상황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서로 주고받는 “젖으면 벗어야지요~ 냅둬 마르게~”라든가, “요도 젖었잖아요~ 아니 요기만 젖었어~” 혹은 “말라 마르지모~ 그러게요 말라 마르지모”같은 대화체의 시말들은 고통의 극기를 넘어선 어떤 큰 도량의 태도까지도 충분히 읽힌다. 문득 필자의 뇌리를 스치는 질문 하나. 시가 혹은 시인이 세상에서 선의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글쎄, 만약 있다면 정령의 시적 태도처럼 가장 고통의 순간을 문자로 기록하면서도 의미나 목적을 배제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적극적으로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다면 세상은 결코 삭막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
춤추는 신발을 신고 들떠서 원하는 일마다 이루어졌으면
길목의 가로등이 고개를 꼿꼿이 세우게 기다려 봤으면
숨결 고르게 편안해지도록 조용히 보듬고 토닥여 줬으면
볼 때마다 모두들 콧소리가 나도록 흥겹게 흐뭇했으면
쫑알거리는 입술이 매 순간마다 신이 나서 떠들어 봤으면
이 손 움직여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주고 느낄 수 있으면
너희들이 하는 일 모두가 옳다옳다 말해줄게. 응원할게.
―「이러면 좋겠네―아이들의 노래·8」 전문
정령의 이번 시집 속에는 제3부에 놓여있는 ‘치매입담’ 6편의 시편들에 이어 제4부에는 ‘아이들의 노래’역시 꽤 많은 분량인 8편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시인이 대상을 바라보는 시적인 태도나 정서의 표출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는 제3부에서 주로 다뤘던 치매노인에 대한 연민과 제4부에서 다루고 있는 소외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따뜻해서 담담하게 묘사 된다. 더러는 위트 있게, 더러는 직설화법으로 드러내는 시쓰기의 전략은 오히려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묘수가 숨어있기도 하다. 위의 시 「이러면 좋겠네―아이들의 노래·8」은 시간의 층위별로 구사된 것은 아니지만, 화자가 아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전언으로 마무리 되어있다. 8편 속에 드러나는 아이들은 죽음을 아직 모르는 “사별이 뭐에요?”(88쪽)라고 묻는 아이들이고. “이승을 떠난 아버지”(85쪽)를 그리는 아이들이다. 이처럼 소외되고 고립된 아이들에게 화자는 거두절미하고 “원하는 일마다 이루어졌으면”이라고 격려하고 “모두들 콧소리가 나도록 흥겹게 흐뭇했으면”하고 토닥여 준다. 시인의 분신이자 시속의 주체인 화자가 원하는 궁극의 바람은 “이 손 움직여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필자는 시로 혹은 시의 힘으로 행동하는 정령의 시편들을 읽어가면서 시의 본령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만약 문학의 본질이 꿈꾸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소외된 어떤 무엇에 관한 사회적 관심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문학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 따뜻한 시선과 기미와 기척에 관한 진동과 증상들을 입말로 받아쓴 정령의 성실한 이번 시편들은 시의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주었다. 다만 동어반복과 의성과 의태어의 사용에는 조금 더 면밀한 계산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는 시적 논리로서 다음의 시편에서 답을 찾아본다. 그리하여 따뜻한 가슴과 내적 활기를 지닌 정령 시인의 시편들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다.
자음과 모음이 공중제비를 하는 시간은 미지수,
곤두박질치며 구르고 굴러서 허방에 고인다.
허방에 고인 자음과 모음들이 떠나는 날은 자연수,
길을 가다가 차이고 책을 보다가 채이고 글을 쓰다 쓰러져
퇴비처럼 쌓이고 쌓여서 거름이 되어 뿌려진다.
거름이 되어 뿌려지는 자음과 모음들의 꿈꾸는 달은 함수,
그토록 기다려 다지고 다지다보면 행간 사이로 싹이 트고
무시로 구르고 차이면 다져진 글자들은 행간을 행군한다.
꿈의 조합으로 변하는 건 글자들이 시가 되는 날의 변수,
자음과 모음들이 수적 논리로 엮은 공식 위에 수시로 선다.
―「시의 수적 논리」 전문
'∑령의시인바람♬ > [♡] 자자,나비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축하메세지(20202~) (0) | 2020.03.01 |
---|---|
시의 수적 논리/ 정령 (0) | 2020.02.28 |
축하메세지(20200131) (0) | 2020.01.31 |
축하메세지(20200120) (0) | 2020.01.21 |
축하메세지(20200117) (0) | 2020.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