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다에서 보낸 한 나절 소매물도에 들어서는 순간, 잠깐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가파른 언덕에 슬레이트 지붕을 인 초라한 집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다. 길은 파헤쳐지고 공사 중이다. 그 풍경은 마치 70년대 어디쯤의 시골마을에 와 있는 것 같다. 소매물도에서 꼭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다. 다솔산장을 운영하는 정남극씨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섬 여행을 다녔다. 그가 찾아다닌 섬만 800여 개. 그 중에서도 소매물도가 가장 마음에 들어 아예 17년 전부터 눌러 살고 있다. “아무리 다녀 봐도 소매물도만큼 아름다운 섬이 없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어느 때나 예뻐요.” 정씨는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시베리안 썰매개 사모예드종인 누리와 써니, 고양이 엘라가 식구다. 이들과 함께 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배를 타고 낚시를 하며 산다. 다솔산장을 찾는 이가 있으면 방을 청소하고 밥을 지어준다. 소매물도의 풍광을 보려 처음 찾은 이들은 정씨 때문에 다시 소매물도를 찾는다. |
시인들도 그를 자주 찾아온다. 이생진 시인을 비롯해 정호승, 편부경, 박희진 등이 단골이다. 정호승 시인은 다솔산장에서 머물며 ‘소매물도에서 쓴 엽서’라는 시도 남겼다. ‘누님 / 저 혼자 섬에 와 있습니다 / 섬에는 누님처럼 절벽이 많습니다 / 푸른 비단을 펼쳐놓은 해안가를 거닐다가 / 소매물도 다솔커피숍에 철없이 앉아 / 풀을 뜯고 있는 흑염소들의 뿔 사이로 / 지는 저녁 해를 바라봅니다 / 누님이 왜 섬이 되셨는지 / 이제야 알겠습니다 / 하룻밤 묵고 갈 작정입니다’ 소매물도에 봄 구경하러 왔다고 하자, 정씨는 조금 이르단다. “조금만 더 있다가 오시지. 3월 중순부터가 가장 예쁜데.” 섬 여기저기에 노란 유채가 피고 동백도 만개한단다. “천국이 따로 없어요. 망태봉 오르는 길가에는 목이 꺾인 동백이 핏자국처럼 선연하지요. 새벽녘 그 길을 ‘자붓자붓’ 밟고 가는 기분이란. 울음이 덜컹하고 나올 때도 있어요.” 그가 손을 잡아끌며 배를 타고 바다로 가자고 한다. “뭍보다는 바다에 먼저 봄이 온다”며, 가서 봄빛이나 쐬자고 한다. “지금 소매물도 바다 밑에는 숭어랑, 뽈락이랑 학꽁치가 오골거릴겁니다. 봄이면 바다 밑이 마냥 궁금해져요. 그럴 때면 스쿠버장비를 갖추고 바다 아래로 내려가요. 5미터만 내려가 봐요. 거기에 진짜 봄 풍경이 있어요. 상아빛 산호초며 바다풀이며 그리고 헤엄치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 제주도 보다 더 아름답지요.” 그와 함께 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았다. 배는 절벽을 옆에 끼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세물치, 긴여, 고래여, 유리여, 노랑치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바위를 지나고 글씽이굴과, 상어굴을 들락거린다. 그리고 순하고 순한 바다. 봄 햇살이 내려앉는 바다. 이 색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오직 봄빛, 봄빛이라고 할 수밖에는. 그가 문득 배의 엔진을 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보란다. “사람들은 소매물도에 와서는 등대섬만 보고는, 등대섬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는 휙 돌아가 버리지요. 여기, 소매물도 바다에 나와서 눈을 감아 보세요. 파도에 실려 오는 물새소리, 해벽을 타고 오르는 바람소리, 동백이 떨어지는 소리, 멀리서 갓 태어난 아기염소가 우는 소리가 들릴 겁니다. 그게 소매물도에 봄이 오는 소리에요.” |
돌멩이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소매물도는 작다. 반나절이면 돌아 볼 수 있다. 선착장에서 내려 섬 정상인 망태봉까지는 30분. 고작 120m밖에 되지 않는다. 망태봉 오르는 길은 오솔길이다. 동백나무가 드문드문 심어져 있고 흑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등이 땀이 배일 때쯤이면 망태봉에 닿는다. 망태봉에서는 등대섬이 내려다보인다. CF나 관광 안내 포스터에서 봤던 그 풍경이다. 등대섬의 등대는 1917년 8월 5일 첫 불을 밝혔다. 1940년부터 등대지기들이 들어왔는데 아직도 4명이 거주하고 있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하나의 섬은 아니다. 50m 정도 떨어져 있다. 물이 빠지는 썰물 때에는 자갈바닥이 드러나지만 밀물 때엔 배를 빌려 타고 건너 들어가야 한다. 관광지가 아닌 까닭에 상륙선은 따로 운행하지 않는다. 이생진 시인은 등대섬에 반해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산 하나 넘어서 / 물이 길을 내주면 / 맨발 벗고 가는 길 / 엉겅퀴 민들레 진달래 / 모두 빠져 죽는 것들의 넋 / 왜 이곳에서 피느냐 했더니 / '살아서 등대를 좋아한 탓'이라며 / 쓸쓸히 웃는다 / 그 '탓', / 나도 그 탓 때문에 등대로 가는 거다.’ |
망태봉 오른 길에 폐교가 있다. 한때 힐하우스라는 이름의 산장으로 운영되었지만 지금은 문을 닫았다. 운영하던 이성희씨도 섬을 떠났다. 칠이 바랜 나무창, 처마에 매달린 학교 종, 녹슨 미끄럼틀이 텅 빈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 있다. 폐교 주위에 심어진 수령 400∼500년 된 동백나무가 바람을 막아준다. 세월에 닳아 지금은 희끗해져버렸지만, 유리창에는 아직도 예전에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이 쓴 시들이 남아 있다. ‘내 손바닥 위에 / 돌멩이 하나 올려놓고 / 심장에선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다 / 맥박 따라 피어나는 꽃 한 송이 / 나비들이 꽃잎을 물고 날아가 / 돌멩이 가득 숨소리 들려오는 것이다 / 돌멩이 뜨거워져 / 나는 아직 그대를 잊지 못한다.' 시인이어야만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소매물도에 오면 시인이 된다. 심장에선 꽃이 피고, 돌멩이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려는 본능이 숨어 있으며 풍경은 때로 이 사실을 깨우쳐준다. 우리가 애써 풍경 속으로 떠나려는 부정할 수 없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망태봉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솔산장으로 내려오니 감국차를 내어준다. “드세요. 소매물도가 여기 차 한잔에 다 담겨 있습니다.” 차는 향긋하고 달다. 아무런 감미료가 첨가되어 있지 않은, 오직 물과 꽃만으로 만든 차. 분명, 소매물도와 닮았다. “지난 가을에 따서 말린 거예요. 가을이면 감국이 지천으로 피는데, 그걸 차로 마실 줄 몰랐죠. 어느 스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오가는 분들께 한잔씩 내 드리고 있습니다.” 곧 쑥이 올라올 거란다. 봄이 되면, 돌멩이 틈에서, 소나무 아래에서, 아기 염소의 발자국 위에서, 동백나무 아래에서, 수평선 너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아래에서 초록색 쑥이 돋는단다. 그 쑥을 따서, 말려서, 차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권할 것이란다. “향이 짙어요. 섬 전체가 쑥향으로 뒤덮입니다. 밤이면 더 진해져요. 사람을 안달하게 만들죠. 무작정, 모든 것이 그리워집니다.” 정씨가 나가는 길을 서두르라고 재촉이다. 곧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단다. 배가 사나흘 못 뜰 수도 있을 거라며 등을 떠민다. 소매물도 앞 삼연도에는 어둑한 구름장이 몰려오고 있다. “쑥이 돋을 때, 그 때 다시 오세요. 밤에 쑥차 달여서, 저기 ‘폭풍의 언덕’으로 가서 마십시다. 파도소리가 좋고 쏟아질 것 같은 별이 좋지요.” |
봄 spot 1. 폭풍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봄바다 소매물도 선착장 왼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마을 쪽으로 가다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된다. 폭풍의 언덕에 서면 멀리 삼여도가 바라다 보인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다. 따로 경계가 없이 온통 푸른 공간에 가끔 흰 선을 그리며 배가 지난다. 밤이면 폭풍의 언덕에 별이 돋는다. 쌀알을 뿌려놓은 촘촘히 박혀 있다. 밤에 폭풍의 언덕에 서 보시라. 은하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봄 spot 2. 선착장에서 맛보는 회 배가 들어올 무렵, 선착장을 서성이면 엄청난 행운을 얻을 수 있다. 통영과 거제에서 배가 들어올 때면 매물도 주민들이 직접 딴 해산물을 수족관에서 꺼내 온다. 수족관이란 다름 아닌 선착장 앞바다. 구멍이 플라스틱 박스에 멍게, 해삼, 문어, 전복 등을 넣어 바다에 담가 두었다 여행객이 들어오면 꺼내서 회를 떠준다. 방금 물질을 끝낸 해녀들이 잡은 것도 맛볼 수 있다. 해삼이 (포토그래퍼 김정태씨의 조잡한 묘사에 따르자면) ‘애새끼 대갈통’만 하다. 이것저것 놓은 모듬 한 접시가 2만원이다. 봄 spot3. 다솔찻집에서 만나는 사람들 소매물도는 작은 섬이다. 고작 11가구가 산다. 여행 코스라야 등대섬을 다녀오는 것 밖에는 없다. 길도 망태봉으로 난 것 밖에는 없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반드시 선착장 인근에 모이게 된다. 다솔찻집은 정남극씨가 운영한다. 말이 찻집이지 작은 탁자가 세 개 놓여있다. 이곳에서 소매물도에 여행 온 사람들을 만난다. 인사를 나누고 뭍에서 사가지고 온 음식을 나눠 먹는다. 마음이 맞는 이들은 통영으로 나가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여행은 어차피 사람을 만나 속을 터놓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마음 속 깊은 말을 쉽게 할 수가 있다. |
봄 음식>> 충무김밥 소매물도에는 식당이 없다. 직접 취사를 하든지 도시락을 준비해야 한다. 통영에는 충무김밥이 유명하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김밥에 주꾸미·갑오징어 무침과 무김치를 곁들여 먹는 별미. 통영 여객선터미널 앞 부둣가에 김밥집이 늘어서 있다. 뚱보할매김밥(055-645-2619)과 한일김밥(055-645-2647)이 찾는 사람이 많다. 1인분 3500원. 거제(저구항)에서 간다면 멍게비빔밥을 맛보자. 잘게 썬 멍게와 멍게 내장, 새싹 나물을 넣어 비벼먹는다. 향긋한 바다향이 입안에 가득 고인다. 락희(055-638-1241)가 유명하다. interviewee 다솔산장 정남극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섬을 다니다 소매물도 풍광에 반해 눌러앉았다. 경남 창원 출신의 아내와 함께 다솔산장이라는 민박집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비탈진 섬에 집터를 고르다보니 손수 등짐을 지고 돌을 날라다 집을 지었다. 2003년 소매물도에서 사는 이야기를 묶은 책 <섬과 개>를 펴내기도 했다. 소매물도 홈페이지(www.somaemuldo.com)를 운영하며 소매물도 소식을 전하고 있다. 꽁지머리가 멋진, 마음씨 넉넉한 아저씨다. |
출처 : 자연과 함께 하는 사진여행
글쓴이 : ar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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