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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by 정령시인 2010. 3. 12.

대중에게 그는 '맑고 향기로움'을 간직한 무소유의 수행자로 비쳤다. 서울 성북동의 요정 주인 김영한씨가 1996년 1000억원대에 이르는 땅 7000여평(현재의 서울 성북동 길상사)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불교에 문외한이었던 김씨는 기부 대상자 물색을 위해 다양한 종교인들을 만났는데, "나는 생각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나 알아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한 법정 스님에게 감명을 받아 기부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무소유의 삶 때문에 그는 2004년 한국리더십센터 설문조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제치고 '가장 신뢰받는 종교인'에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법정 스님이 무소유적 은둔의 삶만을 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한국 불교계의 대표적인 현실 참여자였다. 그는 1970년대 초 서울 삼성동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며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적극 힘을 보탰다. < 씨알의 소리 > 편집위원을 맡는가 하면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모임인 크리스찬아카데미에 자주 참석했다. 당시 모임의 뒷바라지를 맡았던 김문환 서울대 미학과 교수가 출간한 시문집엔 1974년 1월11일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심경을 쓴 그의 글이 실려 있다.

'세월이 나를 못 가게 합니다. 요즘 거의 연금 상태입니다. 4~5인의 사복이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기랄~. 내가 무슨 솔제니친이라고.'

당시 종교계 인사들의 시국 모임에선 이런 일화도 있었다. 다른 종교의 한 교수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인과 한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식의 발언을 하자 법정 스님은 자신의 승복을 가리키며 '이 옷이 민주화를 논의하는 데 장애가 된다면, 이 옷을 벗고 참여하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젊은이 8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데 충격을 받고, 독재자에 대한 증오심을 이겨내기 위해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가 다시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산골 암자에 거처하면서도 1993년부터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치며 승가와 불자들의 청정한 삶을 이끌었다. 2008년엔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구상을 질타하는 발언으로 다시 사회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대장경 번역에 참여하는 등 한국 불교의 내실을 다지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1970년대 초 송광사 수련원장으로서 현재의 템플스테이 원조 격인 수행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또 도반과 함께 영화 < 7일간의 사랑 > 을 보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도 하는 등 세심한 감성을 간직한 예술가적 인간이었다.

사부대중과 교유하면서도 그는 늘 성찰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의 성찰적 자세는 2008년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에서 남긴 법문의 한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돌이켜 보니 한 일에 비해 받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중 도둑질'을 하면서 너무 빚을 많이 졌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리를 찾으려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도 행하지 말라.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이 오래전 써놓은 '미리 쓰는 유서'의 한 토막이다. 그가 평생 지녀온 무소유 행보는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가르침을 남겼다. 스님은 스스로 깨친 가르침을 평생 어기지 않으려 했던 단정한 구도자의 표본이자 그 정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대학 때 삶의 본질 의문에 출가 결심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스님은 전남대 상과대를 다니던 1954년 홀연히 출가를 결심한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몸소 경험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경남 통영 미래사로 입산, 다음해인 1956년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 스님 문하로 출가한다. 28세에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구족계(具足戒·정식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송광사, 해인사, 쌍계사 등에서 안거 수행을 한다.

1960년부터는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 초대원장인 운허(1892~1980) 스님과 더불어 '불교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한다. 이후 '한글대장경' 역경(譯經)위원,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신문 역경국장을 거치며 경전 한글화 분야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가 번역한 서산대사의 불교개론인 '선가귀감(禪家鑑)'('깨달음의 거울'로 번역)을 비롯, '숫타니파타', '불타 석가모니', '진리의 말씀(법구경)', '신역 화엄경' 등은 지금도 국내 역경 사업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된다.

●스님들이 뽑은 '닮고 싶은 생존스님' 1위

스님이 본격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 1970년대 당시 민주화 인사들을 만나면서부터다. 스님은 이들과 함께 잡지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이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를 짓고 홀연히 수행승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세상에 허명(虛名)이 너무 많이 알려졌다는 이유에서였다. 그후 스님은 글쓰기에 매진하는 한편 조금씩 써왔던 글들을 책으로 묶어내게 된다.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1976년)도 이때 출간됐으며, 이후 나오는 책마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문명(文名)을 떨치게 된다.

한동안 스님의 보금자리 및 대중들과 만나는 광장이 됐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와의 인연은 1996년부터다. 스님은 서울 도심의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이곳에 길상사를 창건하고 회주(會主) 자리를 맡았다. 그 뒤 해마다 개원일(12월14일)에 가까운 일요일이 되면 기념법회를 열어 대중 법문을 해왔다.

●환경보호·생명사랑 운동 실천도

2003년 스님은 "내 스스로가 말이 너무 많았다."면서 길상사 회주 자리마저도 내놓고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가 스스로 땔감을 구하고 밥을 짓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그러나 최근 건강이 악화돼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도 길상사 대중법문만은 멈추지 않으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수행자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 [포토]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그런 모습에 일반 대중들뿐 아니라 수행자들도 존경심을 나타냈다. 지난해 10월 조계종 불학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에서 스님은 원효, 성철, 달라이 라마 등에 이어 '스님들이 가장 닮고 싶은 스님' 6위에 뽑혔다. 설문조사 당시 생존해 있던 스님 중에는 1위였다.

그렇다고 스님의 삶이 무소유의 실천과 법문, 글쓰기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그는 1994년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발족, 환경보호와 생명사랑 운동도 꾸준히 실천했다. 세상을 향한 쓴소리는 입적 직전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 운동은 물론 최근 대운하 사업을 두고는 "생명을 파괴하는 대재앙이자 국토에 대한 무례"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