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호(2014 가을)
서평/김영덕/생명에 대한 외경, 그리고 능란한 독백의 변주곡
김영덕
생명에 대한 외경, 그리고 능란한 독백의 변주곡
- 정령의 <종이배>와 <연꽃 홍수>, <별사탕 먹는 법>
1
마지막 빙하기 이후 인류가 혈거 생활을 하며 수렵채취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혹한과 혹서,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부터 자유로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은 그렇게 연약한 존재다. 그리고 삶은 기본적으로 소멸을 향해 행군을 하는 슬픔의 기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위대하다는 건 이야기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혈족에서 무리, 부족, 국가라는 언어 공동체의 비옥한 토양에 터를 잡고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며 함께 만들어내고 때로는 덧붙여 나가는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의 조화까지도 마음껏 부릴 수 있었다. 인류문명의 날줄과 씨줄은 어쩌면 스토리텔링일지도 모른다.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고대 중동지역의 대홍수 설화(說話)는 히브리 성서 속의 ‘노아’라는 인물까지 만들어냈다.
정령 시인은 ‘종이배’에서 “노아의 방주가 오랜 세월 종이로 탈바꿈 했겠다. (중략) 조금씩 말라가며 또 다시 물 위에 뜰 그 날을 위해 당분간은 제 몸을 깎아 종이로라도 있어야 했겠다. 작은 개울에서 뜨는 연습을 하며 반가움에 눈물 조금 흘렸겠다. 아무도 그 심정 몰랐겠다.(중략)”를 통하여 개울가에 버려진 한 척(?)의 보잘 것 없는 종이배를 순식간에 그 거대한 노아의 홍수 설화 속 방주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 작은 종이배를 찬찬히 관찰하여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심화, 확산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특히 마지막 연에서 “오도카니하겠다”라는 끝내기 서술을 통하여 방주의 외로움에 주목하다가 결국 그 외로움을 향하여 스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동참한다. 사실 종이배, 아니 방주의 숙명은 그것이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홍수에 하염없이 노출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그렇게 절실하게 매달렸던 방주도 맨땅이 나타나기 무섭게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려졌듯이, 종이배의 운명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종이배를 만든 아이는 그것을 잠깐 개울물에 띄워 놓고 놀았지만 싫증이 나자 미련 없이 버렸다. 그런데 그것이 꼭 종이배나 방주에만 해당될까?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뒷간 갈 때와 올 때의 사람 마음이 다르듯,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이 시의 핵심 서사이기도 하다.
노아의 방주가 오랜 세월 종이로 탈바꿈 했겠다. 산을 깎고 아스팔트가 난 길 석조울타리에 나앉은 걸 보았거든. 하늘이 까매지고 통곡하는 소리 격하게 들렸거든. 그럴 때가 있었거든. 온몸에 흐르던 핏줄기가 거꾸로 솟아 멈추지 않고 귓속에 선바람 소리만 쌩하니 지나고,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하던 세상이 무너지던 날, 모든 생명의 연장을 위해 단 하나의 짝들만 탈 수 있었던 안식처, 홍수를 이겨낸 후, 방주의 문을 활짝 열고 힘차게 내디딘 맨땅, 이 종이배도 그랬겠다. 조금씩 말라가며 또 다시 물 위에 뜰 그 날을 위해 당분간은 제 몸을 깎아 종이로라도 있어야했겠다. 작은 개울에서 뜨는 연습을 하며 반가움에 눈물 조금 흘렸겠다. 아무도 그 심정 몰랐겠다. 오늘 이 배도 하늘이 무너지고 거센 비바람 몰아칠 때 통곡하며 짝지어 오던 그 기억, 오도카니하겠다.
- <종이배> 전문
이 시를 다시 읽다보니 문득 엊그제 추석연휴에 본 뤽베송 감독의 영화 ‘루시’의 한 장면이 클로즈업된다. 영화는 모든 생명체가 외부 환경이 좋을 때는 종족번식을 하면서 진화하지만, 환경이 극단적으로 좋지 않으면 스스로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고 했다. 그런데 정령 시인의 ‘방주’는 하늘이 까매지고 거센 비바람 몰아칠 때 통곡하며 짝지어 오던 그 기억을 잊지 못해 ‘제 몸을 깎아 종이로라도’ 존재하는, 종족번식을 통한 진화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령 시인이 하찮은 사물들까지도 귀한 생명체로 대하는 따뜻한 시선을 가졌다는 사실이리라.
2
정령 시인은 시 ‘연꽃 홍수’에서 우리의 전통 농경사회의 풍경을 매우 서정적으로 그린다. 기억의 지평 너머로 사라져가면서 이제는 흑백사진으로만 존재하는 산업화 이전 5,60년대의 정서를 놀랍게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마치 하늘이 뚫린 듯 밤새도록 무섭게 쏟아지던 장대 같은 빗줄기,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매미소리 무성한 땡볕 내려 쪼이는 대낮의 평온함이 극적으로 대비되며 차라리 헛웃음을 야기한다. 시인은 ‘지게 한 짐 지고 건너오시던 아득한 선로 위,’를 통하여 보급로도 끊겨 섬처럼 고립된 마을, 식량과 식수도 떨어진 절박한, 쑥대밭이 된 마을의 처연한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천연덕스럽게 묘사했다. 특히 ‘중생들의 벅찬 환호성, 연꽃 물결’ 대목에서는 매혹적인 한 폭의 수채화가 따로 없다. 정령 시인은 절망을 희망으로 치환하는 연금술사이다. 홍수에 일렁이는 연꽃 물결은 구원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사실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에서의 물난리와 달리 농촌에서는 황톳물이 휩쓸고 간 자리도 소박했다.
몰랐었네. 비가 오면서 시나브로 개울을 덮고 논밭을 쓸고 댓돌을 넘을 때까지 그칠 거야 했었네. 봇물이 차올라 있을 때는, 차마 그러리라는 것을. 물살에 휩쓸려 정처 없이 흘러가던 송아지의 애처러운 눈빛을, 가시연꽃 잎 떠다니는 혼탁한 못 속의 연보라빛 봉오리를 보고서야 알았네. 지게 한 짐 지고 건너오시던 아득한 선로 위, 눅진한 홍수 끝에 저리도 넓적한 등판으로 하늘 밑에 연잎 떡하니 벌어져 알았네. 장독 엎어지고 깨어지고 허물어졌어도 대추나무가지에 매달린 솥단지 내걸고 푹 퍼진 수제비 뜰 때, 켜켜이 연이파리 못 속에 앉아있는 걸 보고야 알았네.
흙탕물에 절은 방바닥 물때 벗기고 푹 꺼진 마루 훔치던 후덥지근한 그 날의 태양, 발그레 붉어진 연꽃이었네.
책장에 촘촘히 꽂혀있다 물벼락 맞은 몸들 낱장 헐지 않도록 다림질하여 말리던, 한 여름의 연잎들이 책갈피 같은 연밥을 내주는 걸 보고야, 홍수였네. 연꽃 홍수. 푸른 잎 펼치고 유구한 세월을 안아 떠받치고 온, 중생들의 벅찬 환호성. 연꽃 물결, 홍수로 일렁거렸네.
- <연꽃 홍수> 전문
정령시인은 또한 홍수 전후의 인간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설마, 차마 홍수가 나겠느냐는 부정의 심리 기제에서 출발하여 막상 벌어진 홍수 속에서는 미망과 집착을 털어 버리고 온전히 받아드리는 시골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천연덕스럽게 펼쳐놓는 것이다. 쉬운 표현 속에서도 독자들의 심금을 뒤흔드는 묘한 힘이 있다. 그리고 이 시의 화자는 ‘몰랐었네’와 ‘알았네’라는 독백의 레토릭을 리드미컬하게 반복하며 독자들과 함께 이 시의 절정으로 다가간다.
한편, ‘솥 떼 놓고 삼년’이라는 말이 있다. 준비는 해 놓고도 결단력이 없어 실행을 못하고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옛날 이 땅에 살던 백성들이 이사갈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가재도구가 솥단지였다. 빛바랜 6.25전쟁 사진을 보면 피난민들은 하나 같이 지게에 솥단지와 이불보따리를 얹고 길을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환경이 열악할 때 인간 생존의 기본은 혈족과 함께 먹고 자는 문제에 수렴된다. 북방 유목민의 DNA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목민들은 가진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필요한 것을 새로 구하면 되기 때문이다. ‘장독 엎어지고 깨어지고 허물어졌어도 대추나무가지에 매달린 솥단지 내걸고 푹 퍼진 수제비 뜨’면서도 홍수로 많은 것을 잃은 이재민인 이 시의 화자와 그 가족들이 좌절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송아지가 홍수에 쓸려 떠내려 갈 정도면 돼지나 염소 등 가축은 물론, 많은 가재도구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신비와 생명체를 향하여 찬미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아름답지 않은가?
3
알사탕이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네.
그 밤 흔들리는 다닥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달콤한 입맞춤을 주워 함께 오물거리네.
사랑니에 비릿한 풀맛이 스미네.
흐려지는 불빛 따라 바다가 흐르고,
놀란 어금니가 와작, 응어리 오지게 깨트리네.
오톨오툴 밤별들이 와르르 쏟아지네.
입안으로, 목구멍으로, 가슴 언저리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간 꼭 그 자리에 스미네.
비릿하게 넘어가네.
너도 나도 넘어가네.
- <별사탕 먹는 법>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첫 번째 연에서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알사탕을 무심코 ‘다닥나무 그늘에 숨어 있던’ 너와의 ‘달콤한 입맞춤’을 연상하며 몽환적으로 오물거리다가, 두 번째 연에서 갑자기 나를 두고 떠나간 ‘너’라는 냉엄한 진실과 조우하자 그 단물은 ‘비릿한 풀맛’으로 돌변하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 눈물, 콧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려 풍랑 넘실대는 바다가 된다는 구도가 재미있다. 특히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사나운 바다의 풍랑으로 바꾸는 그 당찬 기개가 예사롭지 않은데, 이 대목에서 나는 옛 강화 전등사 스님이 이 땅에서 그 전통이나 규모라는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합천 해인사 스님을 문경새재에서 만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찰의 규모를 자랑하면서 했다는 가마솥 이야기가 떠오른다. ’7년전에 전등사 큰 가마솥에 팥죽을 쑤었다. 동승(童僧)이 배를 타고 팥죽을 건지다가 풍랑을 만나 익사했는데, 지금까지도 그 팥죽을 먹고 있지만,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아직 시체를 못 찾았다’는 그 풍랑 이야기 말이다. 이쯤되면 허풍과 과장의 레토릭도 챔피언 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화자는 언제까지나 그 애수의 바다에서 허우적대지만은 않는다. 두 번째 연의 마지막 행에서 ‘놀란 어금니가 와작, 응어리 오지게 깨트리’는 결기와 단호함, 의연함, 성숙함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 번째 연과 네 번째 연에서 시인은 ‘싸늘한 바람이 불어간 꼭 그 자리에 스미네’라는 독백을 통하여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면서 ‘다닥나무 그늘’의 그 밤별들이 ‘입안으로, 목구멍으로, 가슴 언저리로’ 와르르 쏟아진다고 노래하며 열일곱 풋사랑의 한 장(章)을 멋지게 마무리한다. 그런데 정령 시인의 밤별들은 깡마른 단발머리 고모 등에 업혀 어머니를 기다릴 때 ‘밥으로 보였다’던 유년시절 고은 시인의 그 별들과 어떻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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