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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이詩발표♬/[♡] 계간문예지

아라문학(2015봄호)-근작조명(허문태)/정령의 시읽기

by 정령시인 2016. 9. 17.

 

근작조명 >

 정령 :  세상과  소통하는 서정의 출구 하나 열다

허우범시인의 시읽기

 


 


9월 초승달이

알곡처럼 속살이 여물 때쯤

휜 허리 마디마디

외할머니는 괴질을 앓는다

 

그 황혼 한 자락에 손을 넣으면

내장이 비쳐드는 아린 알몸에

오한처럼 서걱이는

한 줌 소금기

 

높새는 밤새 처마 끝에 울고

그 청상의 아련한 불빛 사이

톡톡 튀어 오르는

어린 손자들의 은빛

비늘들

 

한평생 촉촉이 베틀에 앉아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천을 짜는 그 눈의

긴 촉수여

 

한갓 목숨쯤이야

있는 듯 없는 듯

뜰 아래 흰 고무신 한 켤레

 

새벽녘까지 허옇게 모시를 삼다

뿔테 고운 돋보기를 벗어놓고

윤기 좌르르

이때 한 번 외할머니는 허리를 펴신다

―「새우


시인은 환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우러나는 삶을 강조하는 언어들을 사용하여 시와의 접촉을 수월하게 만든다. 새우속에 나타난 시어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의 생활이 그대로 거짓 없이 드러난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봄에 산란하여 주로 바다 연안에서 생활하는 새우는 가을에 이르러 그 통통하고 맛깔스러운 살을 자랑하게 된다이 새우와 톡톡 튀어오르는 손주들 때문에 베틀에 앉아 허리 한 번 펴질 못하고 괴질을 앓는 외할머니는 서로 닮아있다. 붉은 빛이 도는 새우의 몸 한 구석을 더듬으면 소금이 서걱인다. 높새가 처마 끝에서 우는 청상의 불빛 아래 외할머니는 베틀을 짠다. 새우 눈의 촉수는 돋보기를 쓴 외할머니의 눈과 상응한다. ‘한갓 목숨쯤이야 있는 듯 없는 듯 새벽녘까지 허옇게 모시를 삼다 뿔테 고운 돋보기를 벗어놓고 이때 한 번 허리를 펴시는 외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할머니이다. 우리들의 할머니는 홀로 앉아 돋보기도 없이 바느질을 하고, 다듬잇돌을 두들기고, 이불소청에 풀을 먹이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했다. 짠하다. 시인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알레고리화시키면서 완성된 울림을 가져온다. 다음 시는 더욱 우리를 생활 속으로 밀착시킨다.

 

모든 무너지는 것에는 사이렌 소리가 난다 허리 부분이 앙상히 잘린 도로 확장 공사장 빈 터, 달빛이 은은히 떨어지고 있다 벽돌들의 잔해 속에서 월셋방 벽보가 지느러미를 파닥인다 그 수없이 드나들던 산동네 골목길, 다시 언뜻 가겟집의 백열등이 눈앞에 흔들리다 사라진다

 

아직도 나팔꽃은 낮은 담장을 기어오른다

 

거기 통장네 집 손바닥만 한 창문 앞까지, 거인처럼 포클레인이 무기질의 근육을 완강히 감추고 눌러 서 있다 외등 둘레로 왁자지껄 한파가 깔린다 귀 기울이면, 나팔꽃 속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지금쯤 어느 강을 건너고 있을까

 

퍼런 집념의 삽날들 사이로 물고기의 비늘처럼 달빛이 떨어진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는 또 소박한 가슴들을 얼마나 무너뜨렸는가 무너지는 것에는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어쩌면 차라리 그것이 힘인지도 모른다 신호등에 걸려 있는 저 천진한 눈빛들

  ―「포클레인

 


모든 글은 진술로 이루어진다. 시를 움직이는 것이 한 줄의 진술이라고 가정할 때, 허우범 시인의 진술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공사장에서 펼쳐지는 개발이라는 낯선 언어가 물밀듯이 들어와 이곳저곳을 초토화시키던 시절이 있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하는 노래가 초등학교 시절이던 6~70년대, 부역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던 시기도 있었다. 개발에 밀려 도시로 이사 온 사람들에게는 아픔일 수밖에 없는 상처일 것이다. 무너지는 것에는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추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갈망이 사이렌 소리로 울림을 가져온다. ‘아직도 나팔꽃은 낮은 담장을 기어오른다시인의 아포리즘이다. 추억에 대한 사람들의 정은 담장을 기어오르는 나팔꽃이었음 한다는 것이다.

 


다 생략하고

어려운 상징만 남았다.

 


침묵 아니다 무념이다

수 만 가지 아니다 하나다.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다.

 


하늘로 향한 가지 끝에

아침 햇살 설핏 지난다.

―「고사목

 


어느 시인의 시평에서 작가의 자연이 언어라고 할 때 시를 쓰는 것은 언어의 질서를 발명하고 파괴하는 혁명가와도 같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시를 쓰는 작가들은 투쟁하는 것이지만 체 게바라의 혁명과는 다른 문학적이고 섬세한 언어의 혁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사목]은 허우범 시인의 모든 어휘의 혁명을 일으키며 정점이 되는 시로 주목이 된다. 고사목은 사전적 의미로, 병이나 산불, 노화 등으로 인해 나무가 서 있는 상태에서 말라 죽은 나무이다. 과거에는 병해충의 우려 때문에 제거하였으나, 최근에는 생물의 다양한 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고 나무들 간의 에이즈로 불린다. 이미 죽은 상태인 고사목, 죽은 것을 살려내는 시인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했다. 시인의 자아는 시 속에서 희망보다는 절망, 밝음보다는 어둠의 미세한 틈 사이에 죽을 때까지 혹은 죽어야 사는 존재이다. 단순한 시적 대상이지만 시인의 생활의 터전이 아닌 자신을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 자신의 내면의 고요와 시 속의 고사목이 지닌 죽음의 의미는 신체를 지닌 인간의 숙명에 대한 깊은 통찰의 산물로 보여진다. ‘하늘로 향한 가지 끝에 아침햇살이 설핏 지난다아침햇살이 기지개를 펴고 살아나듯이 시인은 오늘의 희망을 품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해마다 문내실 마을에 장마들면

무너진 토담을 지나

에베미 들판에서 백령산 자칫골까지

마냥 히죽이죽 헤매던

고모야

문내실 고모야

 


그 해,

유월 지나 칠월인가 팔월인가

온 산하에 콩 볶듯 총소리에 놀라

하얗게 정신을 놓아버린

눈 맑은 고모야

막내 고모야

―「개망초

 


자연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삶의 원형으로서 유년의 기억을 복원한다. 해마다 찾아오는 개망초에게서 시인은 애잔하면서도 서글픈 시선을 건넨다. 개망초는 번식력이 엄청나서 농촌에서는 여기저기 아무데서나 자리잡고 잘 자라서 뽑아놓고 돌아서면 또 자라고 해서 밭농사를 망쳐놓는다고 하여 망초라는 얘기도 있고, 일제 강점기 때의 귀화 식물로 나라가 망했을 당시에도 하얗게 피어서 망할 망()자를 넣어서 개망초가 되었다고 하는데, 개망초의 꽃말은 가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게 해주고 멀리 있는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게 해준다 라고도 하고 화해의 뜻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신선한 꽃말의 이 꽃은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로서 꽃이 필 때 춘궁기라서 어려운 것도 있지만,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합방하던 1910년경에 유독 많이 피어서 '망할 놈의 풀'이라며 지팡이로 후려치고 뽑아서 나라 잃은 설움의 분풀이 대상이 되었으며 시대에 저항하는 상징의 뜻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온 산하에 콩 볶듯 총소리에 놀라 하얗게 정신을 놓아버린 눈 맑은 고모야 막내 고모야’ 하고 마냥 히죽이죽 헤매던 고모야를 찾는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의 우리 삶은 끝없이 개망초가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개망초와 유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인의 유년의 기억은 내면에 남은 상처의 깊이를 키우고 지우며 순수한 내면으로 향한다. 이렇게 만난 시인의 내면은 유년의 근원인 기억의 문을 열고 고단한 일상을 살다간 이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야말로 과거의 원형 속에서 오늘의 실존을 증명하는 방법일 것이다. 결코 달갑지않은 개망초꽃이지만 개망초는 시인에게 있어서 유년의 기억이었던 고모의 행방과 그 전쟁 속에 남아 있는 아스라한 기억의 뿌리를 기록하는 생의 이력서인 셈이다.

 


!

숨이 멎었다.

 


그 누나의 꽃무늬 팬티

반닫이 맨 밑 서랍에 단정히 접혀 있었다.

친구 몰래 책가방에 숨겨왔다.

비 오듯 땀이 흘렸다.

 


땀방울이 온 몸을 적시도록 살고 싶었다.

촘촘히 희망을 담는 곡식들처럼

뜨거운 벌판을 가로질러 달리고 싶었다.

, 미친바람이 되어

겨울 강 어둠 속에서 홀로 헤매었던가?

 


제 스스로 뜨거워 질 수 만 있다면

제 스스로 뜨거워 질 수 만 있다면

 


저물 녘,

문득, 다시 그녀 앞에 앉는다.

! 숨이 멎는다.

진땀이 뚝뚝 떨어진다.

―「불가마

     


이 시는 허우범 시인의 재차 강조되어 마땅한 생활 속의 리얼리즘이 시의 메타포속에 그대로 녹아있는 시라 할 것이다. 자신의 지나온 생을 생생하고 발랄하게 기억하면서도, 그것을 현재적 삶과 간단없이 연루시키면서 확확한 상상을 일구어내는 견고함이 뒷받침되어 나타나고 있는 시다. 한 때는 붐처럼 여기저기 불가마집이 많이 생겨나서 호기심에 참 많이도 가서 계란도 까먹고 식혜도 마시고 미역국도 먹었었다. 여기서도 시인의 기지가 여지없이 불타오르듯 확 얼굴이 달아오르게 한다. ‘그 누나의 꽃무늬 팬티 반닫이 맨 밑 서랍에 단정히 접혀 있었다. 친구 몰래 책가방에 숨겨왔다.’ 얼마나 진땀이 나는지 상상이 되어 양볼이 뜨거워진다. 아마 불가마 앞에 앉으면 누구나 겪는 뜨거움이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뜨겁기 때문에 뜨거운데 시인은 이렇게 누나의 팬티이야기로 뜨거움을 풀었다. 시인의 감수성에 박수를 보낸다.

 


다섯 편의 시를 읽으니, 읽는 내내 오감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허우범 시인의 고향이 충북 보은이라서 정서가 비슷해서 일거라는 생각도 마저 든다. 허우범 시인의 눈은 작은 것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살피고 관찰한다. 시인은 관찰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사유하고 관념적인 상징을 통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는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들고 그리워하게 한다. 본다는 것은 느끼는 것이다. 사물을 보고 우리가 사유할 수 있다는 것, 축복이다. 과학시간 생물실험때만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늘 관찰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연구한다. 그래서 누구는 발명을 통해, 혹은 언어를 통해 관찰한 것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보는 것은 무한대이다. 앞으로 우리가 볼 세상도 무한대일 것이다. 새우를 먹었을 때에도 발휘되는 관찰력은 이렇게 사유를 통하여 할머니얘기로 발전할 수 있음을 시인의 통찰력을 통하여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무 때고 찾아가 부벼대던 할머니의 가녀린 무릎을 베고 누워 즐겨듣던 옛날이야기가 솔깃하게 들리며 쌈지에서 꺼내어주시던 박하사탕이 입안 가득히 환한 달을 삼키듯이 달달했던 고향의 맛 같은 시, 청각으로 느껴지고 마음으로도 충분히 감이 온다. 고향을 떠나 오기전의 포클레인에 밀려나던 초가집들, 물난리가 나고 산불이 나던 그 해의 고사목들, 고향들녘에 아무렇게나 피어나던 개망초꽃, 모두 눈으로 읽혀지는 고향이다. 어쩌면 허우범 시인의 다섯 편의 시가 모두 고향의 맛, 고향의 소리, 고향의 풍경, 고향의 정취, 고향의 정서에서 묻어나오는 것이라 해도 무관 하겠다. 허우범 시인의 독특한 눈으로 관찰되어진 이 모든 것이 시를 통하여 독자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시인을 통하여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들은 고통을 이겨낼 힘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게 한다. 상처는 상처로, 절망은 절망으로 문지를 때 희망은 다가온다. 고사목의 우듬지 끝으로 아침햇살이 설핏 지날 때도 있었고, 포클레인이 물밀듯이 밀려와 무너지는 그 속에도 나팔꽃은 담장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시인이 시인을 키워왔던 상처와 고통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상처 속에 길이 있음을 지각했기 때문에 비로소 세상과 소통하는 서정의 출구 하나를 열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시인의 생태적 기억이라고 불러도 좋을 삶의 편린들이 지녔던 감각과 절제와 균형으로 재구성해내는 경쾌하고 사실적인 표현은 분명 남다른 시인만의 필력일 것으로 보여진다. 삶의 그리움의 항체를 내장한 감성의 독재자이며, 진폭이 넓은 원초적 혁명가인 허우범 시인의 촉수는 언제나 날이 선 듯하다. 그 촉수 속엔 완성되지 않은 원시적 그리움이 내장되어 있고 그러한 그리움의 힘으로 보편적 현실을 시세계의 언어로 만유인력의 힘처럼 끌어당기는 활기찬 기운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