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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2017겨울호)_김참 [작품론]

by 정령시인 2018. 1. 16.



정령의 작품론_김참.hwp




작품론>

긍정의 힘

김참(museoros@naver.com)

1.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현실 초월적 방향설정을 유토피아적 의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칼 만하임의 견해는 문학과 예술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문학과 예술을 창작하는 주체의 내면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상태와 더 행복한 삶을 꿈꾸는 욕망이 내재하고 있으며 그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작품에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창작에 몰입하는 순간 창작주체는 이미 현실적 근심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문학과 예술은 행복한 꿈꾸기를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은 기존의 문학과 예술을 뛰어넘으려는 초월적 특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과 예술은 늘 변화해 나간다. 작품의 내용이나 표현방식이 변화하는 것도 그런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문학과 예술은 일상에 바탕을 두고 있어도 그 일상을 넘어서려는 초월적인 방향성을 지닌다. 우리가 문학과 예술작품을 읽고 즐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거실에 걸린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음악을 감상하는데 몹시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벽시계를 떼어 방에 걸었다. 시간을 알 수 없는 게 좀 불편하기는 했지만 음악에 몰입하는 게 중요했다. 그의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요인은 많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보일러 소리, 식구들의 이야기 소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나 비행기 굉음, 이런 것들로부터 해방 되어야 제대로 음악에 몰입할 수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잡다한 소리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런 잡음으로부터의 해방이 중요하다. 벽시계를 떼어내는 그의 행위는 지금과는 다른 상태를 희망한 결과다. 사소한 예이긴 하지만 이런 작은 욕망들도 결국 지금보다 더 좋은 상태를 꿈꾸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시가 향하는 곳도 지금 이곳의 이 상태 아니다. 시계소리에 신경을 거슬리지 않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처럼, 시를 쓰는 동안 그리고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일상의 세계를 건너 어떤 다른 세계에 도착한다. 시를 읽고 쓰는 동안 현실의 나는 사라지고 시의 세계에 몰입하는 나만 존재한다. 시는 지금과는 다른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시에 몰입하고 집중을 해야만 우리는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시가 안내하는 세계는 무척 다양하겠지만 결국 우리가 만나게 되는 시의 세계는 현재의 상태를 뛰어넘으려는 행복한, 그러나 고통스럽기도 한 인간의 낮꿈 같은 것이 아닐까.

몰랐었네, 비가 오면서 시나브로 개울을 덮고 논밭을 쓸고 댓돌을 넘을 때까지 그칠 거야 했었네. 못물이 차올라 있을 때는, 차마 그러리라는 것을, 물살에 휩쓸려 정처 없이 흘러가던 송아지의 애처로운 눈빛을, 가시연꽃 잎 떠다니는 혼탁한 못 속의 연보랏빛 봉오리를 보고서야 알았네. 지게 한 짐 지고 건너오시던 아득한 선로 위, 눅진한 홍수 끝에 저리도 넓적한 등판으로 하늘 밑에 옆일 떡하니 벌어져 알았네. 장독 엎어지고 깨어지고 허물어졌어도 대주나무 가지에 매달린 솥단지 내걸고 푹 퍼진 수제비 뜰 때. 켜켜이 연이파리 못 속에 앉아있는 걸보고야 알았네. 흙탕물에 절은 방바닥 물 때 벗기고 푹 꺼진 마루 훔치던 후덥지근한 그 날의 태양, 발그레 붉어진 연꽃이었네, 책장에 촘촘히 꽂혀있다 물벼락 맞은 몸들 낱장 헐지 않도록 다림질하여 말리던, 한여름의 연잎들이 책갈피 같은 연밥을 내주는 걸 보고야. 홍수였데. 연꽃 홍수, 중생들의 벅찬 환호성, 연꽃 물결, 홍수로 일렁거렸네.

―「연꽃홍수전문

정령 시인은 연꽃 홍수크크라는 갑두 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작품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매우 적극적으로 시를 쓰고 있는 셈이다. 정령 시인이 선보인 두 권의 시집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시 한 편을 골랐다. 큰물 뒤의 풍경을 담고 있는 이 시는 첫 시집에서 가장 먼저 만난 작품이다. 비가 와서 흘러넘치는 물이 개울을 넘고 논밭을 타고와 집 앞의 댓돌을 넘고 송아지를 쓸어가는 이 풍경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큰물이 지면 벌어지는 이런 상황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장독은 엎어지거나 깨지고 부엌에 있어야 할 솥단지가 대추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어쩌란 말인가 이 낮선 상황을.

이 풍경은 아마도 시인에게 남아 있는 오래된 기억 가운데서도 뇌리에 뚜렷이 각인된 무척 중요한 장면이라 생각된다. 시인은 이 오래된 풍경을 시를 쓰면서 복원한다. 일상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는 정령 시인의 시는 대체로 가까운 현재의 일들을 담고 있어서 과거의 풍경이나 과거에 있었던 일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이 시는 이채롭다. 왜 유독 이 시에서 시인은 과거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일까.

대추나무에 걸린 솥단지를 마당에 걸고 수제비를 끓이고 푹 퍼진 수제비를 한 숟가락씩 뜰 때, 가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이 마르지 않은 마당에서 평소와는 다른 한 끼의 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큰물이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세간도 쓸어가긴 했을 테지만 해가 환하게 빛나는 마당에서 가족들이 수제비를 나눠먹는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활기가 넘친다. 재난이 휩쓸고 가긴 했지만 모든 가족들이 탈 없이 한 끼의 식사를 하는 장면. 이상하게도 잔칫날의 풍경 같은 느낌을 준다. 즐거움과 활기, 그리고 긍정의 힘, 이는 정령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특성이다. 이런 밝고 긍정의 자세를 가지게 된 건 큰물 지나간 오래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온통 다르게 보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시인이 못 속에 켜켜이 앉아 있는 연이파리를 보고 알게 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태양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다. 늘상 보던 태양이 다르게 보이는 것. 그날의 내가 본 것은 날마다 보는 태양이 아니다. 우리와 늘 함께 있지만 우리가 그 신비를 망각한, 언어화되기 전의 황홀함을 간직한 둥글고 커다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신비로운 태양은 물과 습기를 말리고 눅눅한 풍경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동력이다.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대하는 태양은 사실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런 태양은 호수의 발그레 붉어진 연꽃과 동일시된다. 시인은 연꽃 속에 깃든 태양을 본 것이다. 큰물 지나간 마당에서 가족들과 수제비를 뜨며 연꽃 속에서 발견한 빛나는 태양과의 우연한 만남. 이런 시적 순간을 체험 하면서 시인은 모든 사물과 생명에 내재하는 밝은 면을 발견한다. 세계와 사물 그리고 인간에 대한 긍정은 정령의 시의 특징이자 시인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자세이기도 하다. 정령 시의 화자는 언제나 유쾌하고 즐겁다. 그래서 정령의 시에서 우리는 그늘을 발견하기 힘들다.

 

끈 떨어진 커튼이 펄럭인다.

열 받은 전깃줄에 새들이 비비거린다.

푸른 바람이 마르도록 울음소리가 탄다.

놀란 나뭇잎이 가로등을 깨운다.

적막과 밝음 사이에 어쩌다 와 있다.

 

시간이 오슬오슬 흘러간다.

빛의 그림자가 고양이가 되어 웅크리고 있다.

끈 떨어진 커튼이 문득 새를 바라본다.

전깃줄을 넘다가 바람이 새들을 건드린다.

태양의 비명이 낭자하다.

목젖이 타들어가고 가로등은 나뭇잎을 재운다.

어둠과 고요 사이에 어쩌다 와 있다.

―「어쩌다전문

 

시의 초월성 성향은 시적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시적 언어는 일상어를 바탕으로 하지만, 그 발화의 방식은 일상어와는 다르다. 일상어와 달리 시의 언어는 주로 독백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독백은 이상한 발화다. 자신을 청자로 하는 이 발화방식은 사실 광인의 언어에 가깝다. 언어는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런 목적과는 무관한 발화가 독백이기 때문이다. 혼잣말을 하는 사람은 무엇엔가 홀린 사람이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대상에서 신비로움을 발견한 사람이다.

사물의 신비로움은 언어가 개입되는 순간 사라진다. 언어는 그만큼 폭력적인 것이다. 시는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하지만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물에 내재한 신비로움에 가깝게 다가서려고 한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대상은 우리에게 경이로움과 황홀함을 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반복적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만물에 내재하는 황홀함을 망각하게 된다. 그런 망각을 넘어 모든 사물을 처음 대하던 그 느낌,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난 대상이 뿜어대는 존재감에 압도당해 어쩔 줄 모르는 느낌, 그런 느낌에서 시는 탄생한다.

나뭇잎은 왜 가로등을 깨우고 가로등은 왜 나뭇잎을 재우는가?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은 저녁이다. 저녁은 낮 동안 깨어 있던 것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낮동안 깨어있던 나무가 잠들어야 하는 시간이고 나뭇잎도 잠들어야 하는 시간이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 태양이 달과 임무를 교대하는 시간, 그 적막과 밝음 사이에 나는 어쩌다 와 있다나는 어쩌다 이 짧은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야말로 어쩌다 그 순간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시인의 중얼거림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낮과 밤이 교차하는 그 아주 짧은 시간과 마주치게 된다. 전깃줄에 앉은 새들의 비비거리는 소리를 듣는 짧은 순간, 전깃줄을 넘던 바람이 새들을 건드리는 순간, 그리고 어둠과 고요가 교차하는 순간, 우리는 정말 우연히 그런 순간들과 마주하게 된다. 세계의 모든 사물이 자신의 생명력과 혼을 드러내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흥을 주는 순간, 이런 시적인 순간과 대면한 인간은 모두 시인이 된다. 평범한 것 같은 대상들이 자신의 영성을 드러내는 이런 순간, 이런 홀림의 순간은 바람이 태몽을 꾸고 공기가 몽정을 하”(적요)는 신화적 물활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짧은 순간 우리는 일상의 세계를 넘어서는 세계의 다른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에 볼살이 부풀어 오른다 그 볼살 금방이라도 터질라 말라가는 다리가 허리가 바람을 탐하고 몸을 비튼다 하지는 밤에도 살아나 달빛을 가린다 뜨거운 속을 밤새 뒤집는다 햇살을 밥 대신 오물거린다 진딧물이 살 속을 파먹고 성긴 바람이 잠시 머물다 잠을 잔대도 어깨라도 비워 몸을 내어준다 가지 마라 붙잡다가 오지 마라 보냈다가 비튼 몸, 꿈속으로 걸어가고 달 속으로 달려가고 별 속으로 뛰어가 오래오래 머물러라 설핏 바람 한 줄기 지나다가 부푼 볼살에 홀리면 연자줏빛 짧은 혀를 내밀고 바람의 엉덩이를 핥는다.

―「쑥부쟁이전문

 

하지는 정오의 태양 높이가 가장 높고, 일사 시간과 일사량이 가장 많은 날이다. 지표면은 태양으로부터 가장 많은 열을 받는다. 그리고 이 열이 쌓여서 하지 이후로는 기온이 상승하여 몹시 더워진다. 여름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는 밤에도 살아나 달빛을 가린다.” 곧 한낮의 열기가 밤에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에는 쑥부쟁이의 다리가 말라간다. 햇빛에 말라가는 쑥부쟁이는 진딧물이 살을 파먹어도 살을 내주고 바람이 잠을 자도 몸을 내어준다. 이렇게 이 시는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쑥부쟁이를 의인화하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의인화는 시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치다.

의인화는 모든 존재에 신성이 깃들이 있는 것을 보여준다. 시가 추구하는 세계도 바로 이런 것이다. 나와 세계 사이의 간극이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는 황홀한 광경을 발견하는 것, 시에서는 우리가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는 대상도 살아 있고, 풀이나 나무 같은 식물도 인격을 지닌다. 시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중심에 인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지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를 바가 없으며 그들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바로 의인법인 것이다. 의인화는 물활의 상상력과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의 쑥부쟁이는 볼살이 부풀고 뜨거운 태양에 다리와 허리가 말라간다. 밥 대신 햇살을 오물거린다. 시인은 쑥부쟁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하루, 이 시에서 절기로 하지가 되는 그 하루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해가 가장 긴 날인 하지도 의인화되는 것이다. 하지는 밤에도 살아나서 달빛을 가리고 뜨거운 속을 밤새 뒤집는다. 얼마나 재미있는 발상인가.

 

달이 지면 태양은 다시 떠서 꽃을 피우고 향기로 날아온다. 나비가 오고 꽃은 흐드러지고 또 다시 달은 차고 다시 이운다. 다달이 달도 뜨고 지고 꽃들도 노래를 지어 부른다. 노랫소리가 희미해지고 달빛도 가려지면 들리지 않는 비명으로 서서히 잠잠해진다. 가로등 불빛도 지쳐 눈을 감는 정거장, 바람소리마저 버스를 재운다.

주인을 버리고 짓이겨진 광고지가 하얗게 죽은 거리, 말라버린 나뭇잎이 바스라져 까끌까끌한 보도블럭을 살비듬이 되어 덮는다. 꽃은 피지 않을 것이고 달도 차지 않을 것이다.

쉰을 막 넘긴 거기, 데워진 달이 열꽃으로 피어나고 피어난 열꽃은 줄기마다 갈라져 타는 목마름으로 뜨거운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미세한 모세혈관들은 물줄기를 찾아 허덕이며 온몸을 흔들어 깨운다.

데워진 달이, 피어난 열꽃이, 요동치는 심장으로, 간절하게 고개를 든다. 젖은 달빛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달맞이꽃이 노랗게 반긴다.

―「즐거운 쉰전문

 

달은 순환의 원리와 여성성, 자연성을 상징한다. 만월이 그믐이 되었다가 다시 만월로 변해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달은 재생과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달은 순환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존재다. 달이 점점 작아져서 사라지는 것은 소멸이 아니고 재생을 위한 준비다. 여성성과 달은 동일시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달맞이꽃은 밤이 되어야 꽃을 피운다. 낮이 해가 지배하는 세계라면 밤은 달이 지배하는 시간이다. 태양은 꽃을 성장하게도 하지만 그 열기로 식물들과 꽃을 마르게도 한다. 봄과 여름이 태양이 지배하는 낮이라면 가을과 겨울은 달이 지배하는 밤에 해당한다. 가을에는 꽃이 열매를 맺거나 씨앗을 맺는다. 이는 재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하다.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열매와 씨앗은 땅으로 떨어진다. 이 씨앗들은 달이 지배하는 가을과 겨울 동안 땅속에서 깊은 겨울잠을 잔다. 땅속에서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다.

달이 자연성과 여성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달빛이 가려지는 순간 화자가 만나는 풍경은 황량하게 변한다. 달빛이 없는 곳에서는 누군가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도시는 그 불모성을 드러낸다. 쉰을 맞이한 한 여성은 그런 달이 부재하는 불모의 시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쉰을 맞이한 이 시의 화자는 즐겁다. 꽃도 피지 않고 달도 차지 않을 것인데, 왜 그럴까. 이는 이런 불모의 시간이 사실은 재생과 부활을 위한 시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달이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모든 생명은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거치며 끝없이 몸을 바꿔나간다. 삶과 죽음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무한히 반복되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이 시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쉰을 맞이한 화자는 달맞이꽃과 동일시된다. 이 동일성의 원리를 통해 달맞이꽃은 여성성의 회복과 생명성 화복, 나아가 끝없는 운행을 되풀이하는 무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된다. 우주의 운행 과정에서 만물은 되풀이하여 탄생과 성장과 죽음을 반복하기 때문에 쉰을 맞이한다고 해서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2.

 

이번 특집시에는 가족 이야기를 담은 시들이 많다. 시집에서도 가족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긴 하지만 아주 드물다. 정령 시인은 가족사를 시의 전면에 잘 내세우지 않는 시인이다. 농사일을 마치고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의 단잠을 깨우는 개구리 이야기(아버지와 개꼬리),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내 주신 감자 이야기 (할매 감자), 치매에 걸린 어머니 이야기(엄마의 치환)등 극히 일부 시에서 우리는 시인과 시인의 가족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특집시에서 가족 이야기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가족이 처한 상황을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다소 극적인 방석으로 보여주는치매입담연작이 그렇다. 이 연작시에서 시인은 치매에 갈린 어머니의 입담을 화자의 입담과 교차로 들려준다. 이런 상황과 입담은 상당히 체험적인 것으로 보인다. 연작시에 등장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화자는 부지런히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입담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중명하는 것이다. 시에는 아픈 식구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일상은 고통스럽게나 불행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시인은 이 연작시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건강한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 먹으라고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누. 상다리가 부러지나 엄마 다리가 부러지나 볼라고요. 아서라, 상다리 부러질라. 상다리가 부러지나 엄마 엉덩이 올려보지요. 내 엉덩이로 상다리가 부러진다고. 그럼요, 요만한 감자보다 엄청 크잖아요. 얼레, 엉덩이가 삐져서 뿡 소리를 내잖여. 그럼 탈탈 털고 엉덩이만 빼고 앉아요. 넘치도록 담지 말랬더니 엉덩이를 빼고 앉으라고. 주홍색 꽃무더기가 해 난 쪽으로 삐죽 고개를 내민다.

―「군자란치매입담 · 3전문

 

엄마 이 애 알죠?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집이는 나 알우? 아유 어머니 저는 알죠 바로 옆집 살았잖아요 그랬구먼요 몰라보게 예뻐지셔서요 길에서 보면 못 알아보겠잖아요? 엄마 다시 봐 봐요 얘는 뻐드렁니에 가재미눈이에요 그런 말 마요 얼굴 살이 포동포동하고 살결 보드랍고 눈도 작고 얼굴도 주먹만 하고 이만하면 예쁘지요 엄마 나는? 뉘신가 이 분보담 못해도 마음씨 하난 곱지요 뉘 집 엄마인지 마음씨 하나는 비단결처럼 곱기도 하지요 어머니가 최고로 고운데요 거봐요 몰라보게 예뻐졌지요? 노란 애니시다가 살살 고개를 든다.

―「노란 애니시다치매입담 · 6전문

 

상을 차리면서 어머니와 화자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많이 차린다는 어머니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화자는 엄마 다리가 부러지나 상다리가 부러지나 보려고 그런다고 대꾸한다. 상다리에 엄마 다리로 대응하는 입담을 보라, 이어지고 있는 어머니와 딸의 대화도 잘 읽어 보면 재미있다. 밥상이 있고 엄마와 딸이 있는 방에는 해가 들어오고 있고 군자란이 해가 난 쪽으로 삐쭉 고대를 내민다. 군자란은 수선화과여러해살이식물로 봄에 주황색 꽃을 피운다. 군자란은 수명이 길고 생명력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출산기념으로 선물 받은 군자란을 자녀가 결혼할 때까지 기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다른 동물에 비하면 인간에게 가족이라는 인연은 군자란의 생명력처럼 질기다.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해도 가족의 끈은 계속 이어진다. 가족이라는 인연은 길고 끈질기다.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군자란이 있는 풍경이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애니시다가 등장하는 다음 시는 화자와 어머니 그리고 옆집에 살던 이웃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기억력에 문제가 있어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어머니가 화자와 화자의 친구와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은 애니시다가 풍성하게 노란 꽃을 피우는 장면과 묘하게 어울린다. 그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애니시다도 고개를 들고 활짝 핀 꽃을 보여준다.

 

덜거덕덜거덕 오토바이가 으르렁대며 달려와 선다. 누룽지맛 사탕이 가슴에 안겨 부스럭거리며 떠든다. 당이 어쨌다고 그만 하라고, 북어포 너댓 봉지가 갈비뼈를 드러내고 가만 있으라며 웃어젖힌다. 속이 시원하네 암말 말어, 매운맛 컵라면이 빙 둘러 앉아 몸에 좋은 건 하나도 없다 투덜거린다. 고만해 다 내가 먹을 거라고, 털썩 앉은 불룩한 배에 고래를 태우고 당으로 꽉 찬 공기를 빨아 마시며 벌겋게 달아오른 혈압으로 버럭 내지른다. 하루벌이가 누룽지맛 사탕처럼 달달하다가, 북어포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다가, 다 불어 터진 면발처럼 뚝뚝 끊어진다. 불거진 볼에 심통이 가득 차서 벌떡거리며 고래를 걷어찬다. 그만해요 아버지, 버지니아풍년화가 마른 잎사귀로 살살 흔들어 말린다.

―「붉은 버지니아풍년화치매입담 · 4전문

 

고혈압 당뇨에 안 좋다는 것만 잔뜩 장을 봐온다고 큰 소리로 나무라고 뒤도 안 돌아보고 집에 와서는 일손을 놓았다. 밤새 애끓이다 잠 한숨 못 이루고 찾아가니 어제의 일은 까맣게 잊고 새롭게 보시고는 탕수육을 참 잘도 드신다. 맛있죠? 맛없어. 살살 녹죠? 안 녹아, 임자도 얼른 먹어 맛있어. 임자까지 챙겨가며 싹싹 다 비우신다. 불룩 나온 배에 탕수육이 헤엄친다고 틀니를 덜그럭거리며 웃는다. 또 와, 네가 젤 이쁘다. 버석거리는 손가락이 머리칼을 무디게 쓸어내리며 박하사탕을 내민다. 오도독오도독 홀아비바람꽃이 하얗게 핀다.

―「하얀 홀아비바람꽃치매입담 · 5전문

 

버지니아풍년화는 보통의 풍년화와 달리 늦가을에 꽃이 핀다. 밝고 노란색의 꽃이 필 때 잎도 노랗게 물들어 멀리서 보면 잎과 꽃이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버지니아풍년화와 아버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시인은 왜 버지니아풍년화를 의인화하는 것일까? 당뇨 때문에 아버지는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하지만, 사탕을 한 봉지 사온다. 그 광경을 화자가 목격한다. 화자의 아버지는 사탕을 사왔다는 딸의 구박에 화를 낸다. 고혈당 당뇨인 경우는 당분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먹는 것 중엔 몸에 좋은 게 없다는 화자의 말에 다 내가 먹을 거니 그만하라고 화를 낸다. 해로운 음식을 그만 먹으라는 화자의 목소리는 버지니아풍년화가 있는 풍경과 겹쳐진다. 버지니아풍년화의 둥근 잎과 꽃이 피어 풍성한 수형은 불룩해진 아버지의 배를 연상하게 한다.

내용상 앞의 시와 이어지는 다음 시는 작은 다툼이 일어난 다음날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당뇨에 안 좋은 것만 사온 다고 나무라고 집에 돌아온 화자는 밤새 잠을 못 이룬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아버지를 찾아간다. 탕수육을 사들고. 탕수육은 화해의 의미를 담은 선물이리라. 아버지는 어제 일은 까맣게 잊고 임자까지 챙겨가며그릇을 싹싹 비운다. 화자에게 네가 제일 이쁘다고 하며 박하사탕을 내민다. 나는 박하사탕을 소리 내어 깨어먹는다.

아버지의 당뇨와 어머니의 치매 같은 가족의 건강 문제 때문에 화자가 걱정을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나 때때로 그들과 신경전이 벌어지는 것도 결국 가족을 염려하는 마음 때문이다. 당뇨를 앓고 있는 아버지가 왕성한 식욕으로 딸이 사온 탕수육을 먹어치우는 것도, 자신을 염려하는 자식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서로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가족이 있는 곳에서 군자란이 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노란 애니시다가 살살 고개를 들고 버지니아풍년화와 홀아비바람꽃이 활짝 핀다. 꽃이 피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정령의 작품론_김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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