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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의시인바람♬/[♡] 령이읽은 책

시집읽기-백석[사슴]

by 정령시인 2020. 5. 10.

 

 

 

 

 


거의 백년이 다 되어가는

그 오래 전 시절에

이렇게 긴 이야기시를

쓸 수 있었던 필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시편 하나하나가 멋있고 대단하다.

읽기쉬운 우리말 평역이 있어 다행하게도

의미를 새길 수 있었다.

 

시감상)

 

짧은 시/ 비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큰 개비린내가 온다

 

*물큰:냄새가 한꺼번에 퍼지는 모양

 

 

 

긴 시/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물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여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언저리 예데가리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 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룻밤

아베 앞에 그 어른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 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고춧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식초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랫목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벌:넓고 평평한 땅

*멕이고:활발히 움직이고

*애동:한창 피어나는 청춘

*산멍에:이무기

*분틀:국수를

*예대가리밭:산 꼭대기에 있는 밭

*들쿠레한:조금 달고 구수한, 들큼한

*큰마니:할머니

*고담하고:속되지 않고 맑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