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1시집3

봄이니까 봄이니까 립스틱을 칠하고 나선다. 봄이니까. 스카프를 두르고, 스타킹을 신고, 굽 높은 힐을 신었다. 봄이니까.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스카프가 붉어진다. 나비가 조팝나무 꽃무리 사이에서 훨훨 날아다닌다. 그가 따라온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간밤에 내린 비로 꽃봉오리가 톡 터진다. *봄이니까-정온시인의 시 「꽃 피는데 비」에서 인용함. 2022. 4. 2.
아버지와 개꼬리 아버지와 개꼬리 물을 대고 오신 아버지가 흙을 털고 평상에 등을 기댄다. 갓 깨어난 개구리가 갈라진 손등에 올라앉는다. 바람 한껏 부풀리다가 까딱, 하자 폴짝, 뛰어내린다. 평상 위 막걸리 한 사발이 입을 헤벌리고 있다. 사발 속 김치도 철푸덕 주저앉아 덩달아 곯아떨어진다. 아버지 곤한 숨소리 따라 햇빛도 바람도 더덩실 춤춘다. 개구리가 아버지의 콧등에 다시 앉는다. 아버지가 놀라 일어난다. 이 · 노 · 무 · 개 · 꼬 · 리. 액자에 끼운 시와 사진이 지난겨울 얼다녹다 하다가 곰팡이가 슬었다. 그런데 가만보니 이것도 꽤 멋지다. 2022. 3. 31.
연꽃홍수 실제로 관곡지에 가서 내가 직접 찍었다. 이 시의 배경이 된 시. 연꽃 홍수 몰랐었네. 비가 오면서 시나브로 개울을 덮고 논밭을 쓸고 댓돌을 넘을 때까지 그칠거야 했었네. 못물이 차올라 있을 때는, 차마 그러리라는 것을. 물살에 휩쓸려 정처없이 흘러가던 송아지의 애처로운 눈빛을, 가시연꽃 잎 떠다니는 혼탁한 못 속의 연보라빛 봉오리를 보고서야 알았네. 지게 한 짐 지고 건너오시던 아득한 선로 위, 눅진한 홍수 끝에 저리도 넓적한 등판으로 하늘 밑에 연잎 떡하니 벌어져 알았네. 장독 엎어지고 깨어지고 허물어졌어도 대추나무가지에 매달린 솥단지 내걸고 푹 퍼진 수제비 뜰 때, 켜켜이 연이파리 못 속에 앉았는 걸 보고야 알았네. 흙탕물에 절은 방바닥 물 때 벗기고 푹 꺼진 마루 훔치던 후덥지근한 그 날의 태양,.. 2021.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