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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의시인바람♬/[♡] 령이읽은 시

안도현님의 시감상

by 정령시인 2021. 10. 14.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 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개망초꽃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겨울 숲에서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가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국방색 바지에 대하여

 

저 벽에 걸린 바지는

국방색이다

단단한 청춘의 허벅지가 쑥 빠져나갔다

나는 후줄그레한 저 바지를 볼 때마다

우리들의 뒷골목을 돌아가야 빠꼼하게 간판불을 달고 있는

여인숙을 생각한다

그리운 냄새가 킁킁, 날 것도 같다

휴전선 이남에서 국방색 바지 입고 좆뺑이친 사내들 중에

50년대 이후 거기 누워 옆방에서

힘쓰는 소리, 욕지거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놈 있으면

나와 봐라, 국방색 바지가 걸려 있는 모든 방은

그래서 붉은 유곽이며

우리는 유곽이 키운 자식들이다

빳빳하게 다린 바지 훌러덩 벗고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는 나라에서

그 바지 속에다 팽팽한 두 다리를 밀어 넣고

헌 자전거 타고 연대본부에 출근하던 나는

방위병이었다, 그때

군용트럭 위에서 여자만 보면 주먹감자를 먹이던

현역들의 성욕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국방색 바지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종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짬밥을 퍼먹을 때

나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어이 물방위, 하고 불러서는 차렷, 열중쉬어 시키던

한참이나 어린 상병의 낯짝에 침 한번 뱉지 못했던 것도

계급 때문이 아니라

내가 국방색 바지를 그보다 먼저 벗게 되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우리 아버지는 군에 가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그래야 사람이 된다, 하셨지만

나는 내 아들에게는 다시는 입히지 않을

녹슨 못대가리에 달랑 매달려 있는

치욕의 빈 껍데기 같은

저 국방색 바지 .

그대에게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그대에게 가는길

 

그대가 한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랍니다

기관차를 위하여

 

기관차야, 스스로 너는 힘을내 달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찮은 일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큰일까지

혼자힘으로는 될 수 없는게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고

기관사가 타고 서울역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어디든 닿을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겠지

그래서 떠나기도 전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구나

가령 객차에 한사람의 손님도 타지 않았다면

화물칸에 라면상자 하나 싣지 않았다면

비록 떠난다해도 너는 우스운 쇳덩어리일 뿐

그 누구에게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거야

이세상 끝에서 끝까지 얼마나 많은

철길들이 서로 어깨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산이나 목포까지 갔다 왔다고 기적을 울리며

플랫포옴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야, 자만심을 버려야해

국경을 건너고 거친 대륙을 횡단하기 전에는

한반도는 슬픈 작은섬일 뿐이야

내 어린시절, 기차를 몇번 타 봤는지

얼마만큼 먼곳 까지 타고 갔다 돌아왔는지 내기할 때마다

시골뜨기인 나는 미리 주눅이 들곤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야 알았지 세상을 많이 아는것도 어렵지만

세상하고 더불어 사는건 더욱 벅차다는 것을

이제 슬쩍 너에게만 말해줄게 있는데

기관차야, 요즈음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삶은 계란을 잘 사먹지 않는 까닭은 말이야 그것은

삶으로 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역의 이름름처럼

앞으로 많은 날들이 너를 녹슬게 하겠지만

기관차야, 철길위에 버티고 서있지 말고

새길을 만들어 달릴때 너는 기관차인 것이다.

끝이다. 더는 못간다 싶을때 힘을내

달릴수 있어야 모두들 너를

힘센 기관차로 부를 것이다.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아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꿈 할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뻐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뚱어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가지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받는다

죽 한그릇 얻어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냉 이 꽃

 

네가 등을 보인 뒤에 냉이꽃이 피었다

네 발자국 소리 나던 자리마다 냉이꽃이 피었다

약속도 미리 하지 않고 냉이꽃이 피었다

무엇 하러 피었나 물어보기 전에 냉이꽃이 피었다

쓸데없이 많이 냉이꽃이 피었다

내 이 아픈 게 다 낫고 나서 냉이꽃이 피었다

너의 집이 보이는 언덕빼기에 냉이꽃이 피었다

문득문득 울고 싶어서 냉이꽃이 피었다

눈물을 참으려다가 냉이꽃이 피었다

너도 없는데 냉이꽃이 피었다

만두집

 

세상 가득 은행잎이 흐득흐득 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늦가을이었다

교복을 만두속같이 가방에 쑤셔넣고

까까머리 나는 너를 보고 싶었다

하얀 김이 왈칵 안경을 감싸는 만두집에

그날도 너는 앉아 있었다

통만두가 나올 때까지

주머니 속 가랑잎 같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무슨 대륙 냄새가 나는

차를 몇 잔이고 마셨다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그 무엇이

나를 지나가고 잔을 비울 때마다

배꼽 큰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오던

수학 시간에 공책에 수없이 그린

너의 얼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귀 밑에 밤알만한 검은 점이 있는

만두집 아저씨 중국 사람과

웃으면 덧니가 처녀 같은

만두집 아줌마 조선 사람사이에

태어난 화교학교에 다닌다는 그 딸

너는 계산대 앞에 여우같이 앉아 있었다

한 번도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고

미운 단발머리 너는

창밖 은행잎 지는 것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날 만두값도 내지 않고 나와버렸다

네가 뒤쫓아오기를 바라면서

왜 그냥 가느냐고 이대로는 못 간다고

꼭 그 말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너는 지금까지도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 네가 보고 싶어도

매일 가던 너의 만두집에 갈 수 없었다

사랑한다는 것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나는

우물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