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복지를 넘어 인권으로 가는 험한 길'
박옥순 (장추련 사무국장)
무엇이 달라지나
<장애인차별금지법>(이하 장차법)이 제정된 후 난감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장차법 제정으로 무엇이 달라지나? 장애인 차별이 실제로 금지되나? 그래서 장애인이 행복해지는가?
장차법으로 장애인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정부도 하는 것 같다. 대통령의 장차법 서명식과 장차법 시행일에 맞춰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외벽에 붙은 현수막에도 ‘장애인이 행복한 나라’라고 써 있다. 마음 속에 부글부글 분노가 치민다. 행복은커녕 턱을 넘지 못해 식당 앞에서 배고픔을 참고 돌아서야 하는 나라임을 모르는지.
장애인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장추련은 장차법 제정 투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차법이 시행되는 현 시점에도 누구도 장담을 못하고 있다. ‘차별금지’를 화두로 한 ‘인권법’인 장차법이 한국사회에서는 거의 최초에 해당되기에,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을 하지 못하고 있다. 법률이 실제로 어떻게 가동될 것인지에 대해 전망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추련이 장차법 시행일부터 열흘 동안 장애인차별 진정인단을 모집하여 집단 진정을 했다. 집단 진정을 통해서 장차법의 실제 가동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진정사건들을 국가인권위원회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주목해야 한다.
장차법이 시행되자, 많은 이들은 또 묻는다. 시행 이후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고. 달라진 점은 거의 없다. 직접 차별에 해당되는 장차법의 몇 가지 조항만을 예를 들어보자.
장차법 26조 5항을 보면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서 제공하는 모든 문서는 장애인의 접근성을 보장하게 되어 있는데, 어떤 관공서에서 점역 문건이나 음성변환시스템을 갖춘 곳이 없다.
법 제 17조의 보험 거부도 여전하다. 법 21조 3항의 케이블 방송은 아니더라도 거대 방송사들은 자막, 수화, 화면해설 등으로 시청각장애인의 접근성을 보장해야 하는데, 뉴스 몇 개에서만 하고 나머지는 장애인에게 먹통이다. 달라지지 않은 우리 환경을 장애인 스스로 바꿀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움직여야 권리가 보장된다
“오늘 아침 운전자 보험에 가입하려 했는데, 장애인이라 안 된 다네요. 진정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4월 11일 오전 10시, 장애인차별금지실천연대(이하 장추련)에 걸려온 전화내용이다. 장차법이 시행된 날이다. 서둘러 국가인권위원회의 홈페이지의 진정서 양식을 얘기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야호!” 소리를 질렀다. 장차법 시행의 첫 신호탄이다.
장애로 인한 제한, 배제, 거부, 분리 등의 차별을 당했을 때, 스스로 차별 진정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장차법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야말로 ‘법전 안의 법률’로만 존재한다.
장차법은 내가 요구하지 않아도 그 대상만 되면 자연스럽게 제공되는 서비스 또는 현금을 제공하는 정책이나 시책이 아니다. 차별에 대한 본인의 권리구제 의지가 반드시 사용되어야 한다. 내 손과 발을 움직여야 내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
장차법은 제6장 총 50개조로 구성된 ‘차별금지’를 기본으로 한 장애인 인권법이다. 교육과 노동, 재화와 용역, 이동 및 접근, 문화, 정보, 모·부성, 성, 사법·행정절차 및 서비스, 그리고 가정·가족 복지시설 등에서의 차별금지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차별시정기구와 권리구제 수단, 벌칙 등이 여러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차법은 처벌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명시된 장애인 차별의 내용은 장애인 차별이 무엇인지를 알리고 있다. 그리고 고의적이고 악의적이며 반복적인 차별에 한해서는 3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와 3년 이하의 징역에 해당되는 제재조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시정권고 불이행시 법무부의 시정명령을 받게 된다. 장애인차별이 무엇인지 그리고 악의적인 차별에 한해 과중한 제재조치를 갖는 장차법은 장애인 차별을 예방하고 홍보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할 것이다.
법률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차법은 무시무시한 법률이다. 조항의 면면을 살펴보면 장애를 이유로 하여 거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역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특히 사적 영역의 가정·가족의 차별금지 영역에 이르러서, 진정 가능성에 회의를 가질 정도다. 그럼에도 이 법률은 장애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만 1년여 동안 20~30여 명의 장애인이 매주 만나, 자신이 당한 차별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다. 차별당한 상황을 얘기하면서 분노로 한동안 목 놓아 울어야 했고, 그 순간에 상담이 이뤄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법률가들과 전문가들은 이를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조문화했다.
장애인차별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구제수단은 외국의 입법례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총 36번의 토론회와 공청회를 통해 법안을 다듬었다.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발의에 맞춰 법안을 조정했고, 이 안을 기초로 장차법 민관공동기획단안으로 정리했다.
총 12회의 정부와 장추련의 만남 속에서 긴장된 토론과 갈등은 실제로 발생한 장애인 차별을 기초로 한 장추련의 장차법을 ‘무기’로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역시 삭제되고 수정되는 아픔을 견뎌냈다.
이 안은 열린우리당 장향숙의원안으로 국회에 발의되었다. 또한 민주노동당 노회찬 발의안을 기초로 한 한나라당 정화원의원안이 국회에 발의되었다.
위의 세 안을 병합 심의하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대안으로 생산되었으며, 이 안은 약간 수정되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안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7년 3월 7일의 일이다. 대통령 서명식을 가진 후 공포되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이 만들어졌으며, 2008년 4월 11일 대망의 장차법이 시행되었다.
긴장점 있는 조직의 힘은 위대했다
7년간의 장애인계의 장차법 투쟁은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이하 장추련)이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사실 가능하지 않았다. 장추련 초기 출범 당시 40여 개 단체에서 장차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297개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장추련은 장애인계 유사이래,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고 전국의 장애인단체까지 결합하여 7년간 단일대오를 유지하며, ‘장차법 제정’의 목적을 달성한 조직이다.
장추련 초기에 조직구성에 있어 큰 단체와 작은 단체를 구분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큰 단체 중심의 활동이 되면서 작은 단체들이 ‘들러리’가 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장차법이 ‘차별’을 금지하기 위한다면, 그 운동을 하는 연대 조직도 ‘차별’의 가능성조차도 배제해야 한다는 철학적 명분이 주효하게 작동됐던 것이다. 그렇지만 실무와 역량을 고려하여 장총과 장총연 양대 단체와 여성, 제 3그룹, 중증그룹으로 나누어 상임공동대표를 두었다. 여성, 제 3그룹, 중증그룹은 자체적으로 논의를 통해 대표자를 내었다.
법제정 운동에 있어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은 강력한 집행력. 장추련 초기부터 장추련 모든 참여단체가 참여하는 집행위원회가 의결권을 갖는 것으로 정리했다. 상위 구조인 상임공동대표는 자문과 고문의 역할을 하며, 특별히 상임공동대표들이 일정한 힘을 발휘해야 할 때는 지체 없이 함께 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든 것이다. 이는 실제로 장차법 제정운동을 상당히 역동적으로 만들어갔다.
장추련에 참여하는 모든 단체들은 집행위원회의 단체로 결정했다. 그리고 집행위원회가 최종 의결 권한을 갖도록 했다. 거리가 멀거나 실무진을 낼 수 없어 적극 참여가 어려운 상황들이 있을지라도, 조금 느린 걸음으로 다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장애인의 관점이기에 그렇다. 모든 참여단체가 참여하는 의결구조이기 때문에 한번 모이기가 쉽지 않은 점을 고려하고, 자칫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상임집행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 수많은 논쟁과 토론을 하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구성된 구조가 상임집행위원회다.
상임집행위원회의 권한은 집행위원회의 회의안을 내는 것. 따라서 상임집행위원회 구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상임집행위원회 구성 역시 상임공동대표를 설정하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실무력과 집행력을 가진 장총과 장총연을 고려하여 양대 단체와 여성, 제3그룹, 중증그룹 등의 영역에서 1:1:1:1:1 비율의 단체들이 상임집행위원회의 단체로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장차법안을 만드는 법제위원회의 위원장단도 상임집행위원회 구성에 참여키로 했다. 법안 작업과 법제정 운동 두 바퀴를 동시에 돌리되, 양쪽의 바퀴가 연결되어 있어 자칫 다른 방향으로 역주행을 하거나 한 쪽 바퀴가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장추련의 장애인차별금지법안의 최종안은 집행위원회의 의결을 통해 결정하도록 했다.
단체별 할당제 등을 활용하여 결성된 장추련 조직 구조는 오랫동안 장애인계에 고질적으로 이어져온 단체간 갈등과 불신에서 비롯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장애인계의 치부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결국 이 조직구조는 장추련이 장차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흔들림 없이 단일대오를 유지할 수 있는 ‘힘’으로 작동된 것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장차법 조직운동사는 장차법 제정의 역사에서 운동의 주체성에 관한 확인과 다양한 단체들이 가진 차이를 상호 존중하고, 갈등을 해소했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특히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방법, 그리고 그 의미와 조직형성 및 확대 과정에서 발생했던 내부 갈등을 풀어가는 방법 등은 세심하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끊임없는 투쟁이 일궈낸 역사적 산물
장차법 제정 운동은 장애인이 시민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 쟁취 투쟁이었다. 만 7년간의 투쟁은 그야말로 풍천노숙으로 쟁취한 피맺힌 성과이다.
장추련은 장차법 제정 운동 기간을 결코 7년이라고 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부지부식간에 또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터진 장애인 차별의 수백 년의 역사가 있었고, 이 차별을 철폐하고자 조직을 구성하여 대안을 만들고 투쟁하여 법안을 제정하기까지, 과연 7년의 세월로 그 역사성을 가름할 수 있을까?
장추련 투쟁이 가속화 된 것은 2005년 7월 청와대의 일방적인 ‘차별시정기구 일원화’ 방침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투쟁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청와대와 국회 앞 노숙농성 69일, 삭발, 단식, 인권위원회 점거 농성 60일, 지역 장추련 투쟁, 경총·전경련·상공회의소 점거농성, 여의도 국회 앞 농성 20일, 한나라당 점거농성 등 쉼 없이 달려오는 동안 5천만 원의 벌금도 맞아야 했다. 일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은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농성 등으로 인권위원회가 차별금지법 이외에도 장차법 개별 입법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다. 실제로 장차법을 ‘농성법’이라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장차법을 둘러싼 역학관계
장차법은 수많은 관계 행정부처와 관련단체, 시민·인권·여성단체와 심지어 경제계에 이르기까지 상호적 관련성에 의해 탄생했다.
특히 청와대와 장차법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 장차법 시행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차법 제정에 상당한 악재였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장추련은 질긴 투쟁으로 오히려 장차법 제정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했다.
청와대는 2005년에 일방적으로 차별시정기구 일원화 방침을 발표하여 전국을 장차법 제정의 냉기류를 만들어냈다.
장차법 제정 투쟁의 절망적인 시기로 회자된다.
그러다가 인권위원회의 장차법 개별 입법이 선언되자, 각 행정부처를 모으고, 장추련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속에서 장차법 민관공동기획단의 이름으로 「민관공동기획단 장차법안」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각 부처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차법 개별입법을 반대할 때, 장추련의 손을 확실하게 들어준 것이다.
보건복지부의 오리무중은 끝까지 장차법 제정에 악재로 작용했다.
이후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주무부처로서 최선을 다했으나, 여전히 오리무중의 모습으로 평가된다. 장추련의 장차법 제정 분위기에 힘입어 복지부 중심의 장차법안을 만들고 공청회까지 진행했으나, 청와대의 차별시정기구 일원화 방침에 밀려 장차법 제정 중단을 선언했다. 장차법 냉기류를 한반도에 전파시키는 주요 역할을 한 것이다.
장차법 민관공동기획단이 가동되자, 참여하면서 복지부의 본색이 드러났다. 장차법안에 관한 논의에서 인권이 아닌 복지의 시선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 심사과정에서 보건복지부는 ‘장애인 범주’와 관련하여 장추련과의 약속을 깨버렸다. 복지부의 정체성에 비추어 장애인 범주를 장애인복지법으로 한정하는데 동의한 것이다. 복지부라는 조직의 이름으로 말이다.
이는 차후에도 끊임없이 장차법 제정에 있어 복지부 꼬리표가 붙어 다닐 수밖에 없다. 차별시정기구 일원화 등의 문제로 국가인권위원회는 처음부터 장추련을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수도 없는 면담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인권위원회 건물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
어쩔 수 없이 인권위원회 점거 농성을 선택한 장추련과 국가인권위원회는 3차례의 공식적인 간담회를 가졌다. 차별금지법이 생애주기별로 나타나는 장애인 차별을 아우를 수 없음을 명백히 알면서도 60여 일이라는 농성이 다 돼가는 시점에서야 비로소 장차법 개별입법을 선언한 것.
이때부터 장차법 제정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경제계와의 한판 싸움은 어쩌면 장추련이 시비를 거는 모습으로 시작됐다. 차별금지법 반대라며 명확히 입장 표명을 했지만, 로비력이 막강한 경제계가 장차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니 솔솔 걱정이 되었던 것. 장추련은 토론회를 통해 경제계를 열린 공간으로 끌어냈다. 이에 경제계는 ‘장애인 차별에는 공감하나, 기업과 기업인의 손해가 있을 장차법 제정은 찬성할 수 없다’는 말을 공식화한 것이다.
장추련은 경총, 전경련, 상공회의소 점거농성과 기자회견, 대규모 결의대회 등으로 경제계를 압박해 나갔다. 경제계와의 싸움으로 5천만 원의 벌금을 맞은 것에 비하면, 경제계의 어떠한 변화된 모습도 이끌어내지 못한 실패한 싸움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점거농성과 고공농성, 화형식 등의 집중투쟁으로 여러 언론을 타게 되었고, 생각지도 않게 장차법 제정에 오히려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동됐다. 사회적 책무성을 저버리는 경제계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크게 형성된 것이다.
특히 경제계와의 투쟁은 시민·인권·여성단체들의 적극적인 연대로 이어졌고, 지역 장추련이 힘차게 싸우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실패했지만 성공한 투쟁이 장차법 제정에서 경제계와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복지에서 인권으로
7년 아니, 70년, 나아가 700년 이상의 세월 속에서 장애로 인한 차별로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 수많은 장애인의 뜨거운 열망과 투쟁으로 장차법이 제정·시행되었다. 그 속에서 수많은 말과 수많은 고뇌와 더할 나위없는 투쟁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감격을 충분히 누리기도 전에 장추련은 2008년 4월 11일, 그 시행되는 시점에서 장차법이 제대로 장애인의 차별을 금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낼 것인가를 주목한다.
장차법이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투쟁했고, 앞으로도 투쟁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과 관련 법률들 제·개정 등 나아가 정부 각 부처들과 한판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장추련만이 아니 전 장애인계가 여러 형태의 조직 단위로 연대하여 함께 할 것이다.
‘복지’가 아닌 ‘인권’이라는 새로운 가치지향적인 화두를 놓고, 사활을 건 투쟁의 성과가 나타난 것에 연연해하거나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차법이 장애인의 모든 ‘인권’을 보장하기보다는 그 ‘인권’을 찾아가는 아주 사소한(?) 법제도 장치일 뿐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헌법과 법률로써 인권을 모두 보장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나타날 모든 차별은 애당초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법률이 ‘인권’보장을 향한 만능이 아니라는 경험을 통해, 장추련을 포함한 장애인계가 인권단체와 시민단체와 여성단체와의 깊은 연대 속에서 향해 가야할 길은 끊임없는 투쟁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장차법 제정 쟁취 이후 동지들이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이유도, 장차법이 바로 이런 시련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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