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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령의정보담기/[♡] 공부하기

2008 제9회동서커피문학상 당선작

by 정령시인 2008. 10. 24.

<대상>

 

침엽의 생존방식 / 박인숙

                   

활엽을 꿈 꾼 시간만큼 목마름도 길어
긴 목마름의 절정에서 돋아난 가시들
침엽은 햇살도 조금 바람도 조금
마음을 말아 욕심을 줄인다


대리운전하는 내 친구 금자
밤마다 도시의 휘청임을 갈무리 하는 사이
보도 블록 위에 포장마차로 뿌리 내린 민수씨
그들은 조금 웃고 조금 운다
바람 속에 붙박혀 시간을 견디는 일이
침엽의 유전자를 가진 자들의 몫이므로
뾰족이 가둔 눈물이 침엽의 키를 늘이고
세월을 새겨 가는 것


그들의 계절에는 극적인 퇴장
화려한 등장 따위는 없다
한가한 날 고작 흰 구름 몇 가닥 바늘 끝에 걸쳐두거나
흐린 겨울 하늘이 너무 시릴 때
눈꽃으로 피사체를 만들어 보거나


혹한의 계절에도 홀로
숲의 푸른 내력을 지키는 건 침엽이다
그들의 날카로운 생존방식이 숲을 깨우고
바람의 깃털을 고른다
햇살도 이 숲에선 금빛으로 따끔 따끔 빛난다

 

 

 

<은상>

 

은행나무의 안부 / 김택희

                 

                              
우편배달부는 내가 사인을 하는 동안에도
흰 봉투에 새겨진 길을 살피느라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건네 준
은행잎으로 만들었다는 푸른 알약들
안부를 묻는 지인의 손길처럼 싱싱하다
몸 속 오지의 좁은 길까지
큰 혈관으로 혹은 미세혈관으로
길을 터준다고 했다


요즈음 나는 가끔씩
자주 다니던 길 위에서 헤맬 때가 있었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했다


굽은 길 위에 서 있던 우편배달부도 돌아간 어둑 저녁
은행나무 아래에 선다
푸들푸들 바람 비벼 나누는 인사
잎 잎으로 뻗은 손 흔들고 있다
동서남북 흩어진 지구인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져
이 저녁 나는
키 큰 한 그루의 여름 은행나무로 선다

 

<은상>

 

바람의 본적 /  류명순


                          
바람의 신경은 온통 깃발에 쏠려 있다
모든 걸 흔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바람의 입이 물고 흔들어대는 저 초록의 산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날개들이 있다
벼랑 끝에 서서 암 덩어리처럼 뭉쳐진 소나무를 보았다

전신에 바늘이 박힌 채 하늘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몇 만 번의 흔들림으로 나이가 먹었을 그 소나무
수많은 바늘을 꽂고 호젓이 저물어 갔다
바람의 본적을 묻고 싶다
내가 모르는 어느 별에다 호적을 두고 온 것인지
히말리아보다 몇 배의 습곡이 되었을 바람의 역사
나의 날은 늘 흔들림의 날들이었다
낮달처럼 그림자도 없이
그렇게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망치도 없이 등이 휜 여자의 늙은 뼈에
수 천 개의 구멍을 뚫은 바람
나도 오래된 무처럼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본적이 어디인지도 모를 그 바람을 쫓아
어석어석 살아가야만 했다

 
<동상>

 

봄날, 코스모스를 심다 / 최연숙


텅 빈 봄
안개 넘어 한 줄기
기다림의 빛을 끌어당기며
오늘 코스모스를 심는다
더디게 이파리들 키워
꿈이 되지 못한 커다란 생명들
위로처럼 왔다가고
지글거리는 한낮을 숨죽여
우주의 시계가 세시쯤 되면
가는 목 세워 바라볼 하늘에
둥글고 빛나는 그것과
눈 맞출 수 있어야한다
뚫린 가슴에
바람이 둥지를 틀 무렵이면
작은 저것 어쩌면 제 몸만큼
작은 내일로 피겠지
기다림으로 피겠지

 

 

<동상>

 

붉은 칸나가 피는 이맘 때 /  신현임

 

햇빛을 한 잔의 맥주처럼 단숨에 들이킨
붉은 칸나가 길섶을 휘휘 저으며 비틀거리고 있다.
누군가 뜯다 내버린 붉은 칸나 꽃잎이
상처에서 흘린 핏빛처럼 처연하다.


그는 앞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의 목소리는 빙글빙글 돌아 공중으로 분해 되었다.
자꾸 붉게 올라가는 꽃대만 망연히 바라보고 싶었다.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는 대신 꽃의 주름만 만지작거렸다.
소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지상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 생에 단 한번뿐일까? 골똘히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붉은 칸나는 꽃 위에 꽃을 더 자꾸 피워 올리고 있었다.


온몸으로 화들짝 감각이 불타올랐다.
잊은 지 오래된 정념의 깃발도 다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불혹의 나이에 난파된 배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이려니 수긍하기로 했다.
내가 흔들리다 부서지기 전에 그는 날개를 달고 떠났고
나는 그를 더 이상 흔들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붉은 칸나가 피는 계절이 오면
오래된 이야기 가슴에서 비워내지 못해
한 잔 술에 거나해서 거리를 갈지자로 걷는다.

붉은 칸나를 만나면 꺼이꺼이 울기도 한다

 
<동상>

 

커피는 희랍어로 말 걸어온다 / 서희자

 

                              
몇 주, 가뭄 든 정서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감색 숄 걸친 나무 한 그루의 분위길 깔고 있다
저리 곱게 물들려면 얼마큼 내공을 쌓아야 할까
삶의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가지끝 바람이 차다
마술 주전자가 딸깍 딸깍 연기를 뿜어 올리자
안개 속의 여객선 한 척! 내게로 온다
블랙박스를 구호품인 양 챙기는 사이
맨하탄 시가지가 떠오르면서 티파니의 아침은
몇 모금의 환유처럼 달콤했다 역마살 낀 그 시절도
알고 보면 고뇌를 우려 낸 커피 색이다


어느새, 검게 물들기 시작한 지중해
내 고달픈 여정도 정박을 꿈꾸는가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든다
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피라밋!
그 슬픈 신화를 넘기는 순간
뜨겁게 달군 일상이 금세 식어버렸다

 

 

<가작>

 

옥탑방 애벌레 /  장선희

 

                       
행거에 걸린 아침 햇살
트럭에 실려온 짐처럼 칭얼댄다
창문 앞에 더께 놓은 해진 보따리
숨기지 못한 가파른 호흡이 여기저기
소금꽃 피워 물고 있다
벽에 핀 곰팡이가 눅눅해져야
옥탑방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오래 묵은 어둠이 부르튼 손가락처럼
휘휘 라면을 젓는다
창문 흔들며 안부 전하는 겨울바람
아득한 옥탑방 사람에게만 밤은
액정화면 같은 창문에 별문자를 찍어보낸다
칠 벗겨진 뿔테안경 벗으면
듬성듬성 흐릿한 아랫마을 불빛
밤에만 생기는 옥탑방 정원이다
라면 국물로 데워진 온기 속으로 몸 구부리는 사내
사다리 타고 하늘로 오르는 꿈을 덮은
두 겹 세 겹의 홑이불 속에서
동그르 말리는 그의 몸
멀리 날아갈 날개를 만들었는지
자고 일어난 허공 한 쪽이 둥그스름 부풀어 있다

 

[출처] 2008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