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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의시인바람♬/[♡] 령이읽은 시

시감상/동짓달(백인덕)

by 정령시인 2018. 4. 20.

동짓달 / 백인덕



눈이 내린다.

창밖은 서설이 한창,

아내는 멸치를 볶는다.

창안엔 빈 틈 사이 삶이 달궈지고

나는 하르투리안의 책을 읽고,

아내는 남태평양을 유영한다.

지느러미 없이 저 우아한 물질은

그렇다. 당신이 얼마나 숨 고르며 이

세상을 거슬렀는지 말해 준다.

나는 그저, 선언적 명제 아래서만

고만한 섬의 어부가 된다.

성긴 그물로 낯선 은유를 낚아 올려

도매금 어(語시)장에 널어놓고 싶을 뿐이다.

창밖의 서설은 제 스스로 겨워

이제 폭설이다.

올려 보는 창 안에서

유영을 마친 아내가 물빛으로 시선을 건넨다.

나는 아직 '역사의 요동' 속에 있는데,

창 이 쪽, 저 쪽이 진저리치게 밝아온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의 불과 기름에 있고,

저 성긴 눈사이에 하릴없이 서성이고

고단한 참과 꿈의 경계에

지친 빨래처럼 널려있으려니,

창을 메워버리는 눈,

걷어내지 못한 눈의 폭력 아래

이 쪽창 안에서 나지막하게 그대를 부르는

나는 목이 겨워,

겨우, 그대 이름을 부를 뿐.


- 백인덕시집『짐작의 우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