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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의시인바람♬/[♡] 령이읽은 시

시읽기(오든/어느 날 저녁 외출하여)

by 정령시인 2020. 3. 6.

 

어느 날 저녁 외출하여

 

 

오든(미국 Wystan Hugh Auden 1907~?)

 

 

 

어느 날 저녁 외출하여

브리스틀 거리를 거닐었을 때

포도 위의 군중들은

수확철의 밀밭이었다.

 

넘칠 듯한 강물 가를 거닐었을 때

한 애인이 철로 아치 아래서

노래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사랑은 영원하여라.

 

그대여, 나는 그대를 사랑, 사랑하리라.

중국과 아프리키가 합쳐질 때까지

강이 산을 뛰어 넘고

연어가 거리에서 노래할 때까지

 

나는 사랑하리라, 바다가

겹쳐서 매달려 마를 때까지

그리고 일곱 별들이 하늘을 회전하며

거위처럼 꺼억꺼억 울게 될 때까지

 

세월은 토끼처럼 뛸 것이다.

내 두 팔 안에 세월의 꽃과

세계의 첫 사랑이

안기어 있으니.

 

그러나 거리의 시계들은 모두가

윙 하고 돌면서 울리기 시작한다.

아, 시간에 속지 말지니라.

너희는 시간을 정복할 수가 없다.

 

공정이 드러나 있는

악몽의 흙더미 속에서

시간은 그늘에서 바라보며

너희가 키스할 때 기침을 한다.

 

두통과 근심 속에서

생명은 부지중에 새어 나간다.

그리고 시간은 망상을 한다.

내일이니 오늘이니.

 

여러 푸른 골짜기에

무섭게 눈이 뒤덮인다.

시간은 얽힌 춤을 부수고

잠수부의 빛나는 몸을 부순다.

 

아, 너의 손을 물 속에 잠그라.

두 손을 손목까지 잠그라.

들여다보라. 그 물그릇을 들여다보라.

그리고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라.

 

빙하가 천장에서 덜컹덜컹 울고

사막이 침대에서 한숨 짓는다.

차주전자의 터진 금은

죽음의 나라로 가는 입구이다.

 

거기서는 거지가 지폐를 걸고

거인은 잭을 흘리게 한다.

백설 소년이 큰 소리로 외치고

질은 누워서 미끄러져 떨어진다.

 

아아, 그 거울을 들여다보라

거기 비친 네 불행을 들여다보라

사람에게 축복은 줄 수 없어도

살고 있다는 것은 역시 행복되다.

 

아아, 어서 창문 가에 서 보아라.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릴 때

그대의 그 비뚤어진 마음이

비뚤어진 이웃을 사랑할 때이다.

 

이미 밤도 아주 깊어 버렸고

연인들도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시계도 이제는 울기를 멈추었고

강물은 깊숙하게 변함없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