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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의시인바람♬/[♡] 령이읽은 시

정끝별의[밥]중에서

by 정령시인 2020. 6. 10.

정끝별 시인(64년생, 나주)이

'밥'에 관한 시편들을 모아『밥』이라는 제목으로 엮어

2007년에 펴낸 시집에서 몇 편을 골라본다.

밥에 관한 얘기는 곧 생명, 어머니, 우주에 관한 얘기여서

마음에 쉽게 와닿을 뿐더러 시집 밥상에 시들을 골라 올린

정끝별 시인의 안목이 탁월하다.

게다가 각 시에 대한 정끝별 시인의 추임새도 구수하고 풍요롭다.

이 시집은 금동원 화가가 같이 펴냈다.

모든 페이지를 장식한 화가의 그림은

색채가 강렬하면서도 우리네 추억과 정서를 잘 표현한 것 같다.

 

북관(北關) / 백석

명태(明太)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北關)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냄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新羅) 백성의 향수(鄕愁)도 맛본다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金剛(금강)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이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어머니 / 오탁번

어머니,

요즘 술을 많이 마시고 있읍니다

담배도 많이 피웁니다

잘못했읍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잊지 않겠읍니다

밥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자겠읍니다

어머니!

 

떡집을 생각함 / 권혁웅

그 집은 온갖 진미(珍味)의 공장,

집주인이 가래떡을 넣고 돌리면

작고 하얀 얼굴들이 아옹다옹 한방에서 나와

떡국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지

그가 내놓은 시루떡은

팥고물로 새까맸지 안방 구들장처럼

다습게 녹아 있었지

아버지가 형과 누나와 나를 떡메로 쳐서

네모나게 잘라두면

그가 가루를 묻혀 인절미를 만들어냈지

우리 집에 없는 건 그 콩가루였네

사람들이 담장 너머로, 쑥떡 쑥떡

씹듯이 우리를 건너다보았네

우리는 얻어맞은 찹쌀처럼

차지게 손을 잡았지 개피떡에 든 소처럼

조그맣게 웅크렸지 그가

아픈 자리마다 참기름을 발라주었네

먹다 남은 막걸리와

뜨거운 물을 멥쌀에 개어 증편을 만들 때엔

우리 마음도 함께 증발했지

그래, 우리는 그렇게 그 집을 떠났지만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나는 백설기처럼 마음이 하얗게 되네

돌아보지 않아도 눈이 내리네

 

/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적멸보궁 - 설악산 봉정암 / 이홍섭

젊은 장정도 오르기 힘든 깔딱고개를 넘어온 노파는

향 한 뭉치와 쌀 한 봉지를 꺼냈다

이제 살아서 다시 오지 못할 거라며

속곳 뒤집어 꼬깃꼬깃한 쌈짓돈도 모두 내놓았다

그리고는 보이지도 않는 부처님전에 절 세 번을 올리고

내처 깔딱고개를 내려갔다

시방 영감이 아프다고

저녁상을 차려야 한다고

 

국밥집에서 / 김춘수

이 더운 날에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것을

부글부글 끓는 맵싸한 국물과 함께

꿀꺽 삼킨다. 혹은 개 패듯

두들겨팬다.

비명을 한 번 질러 보라고

질러 보라고

오늘이 복날이니까,

 

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 김선우

이 집 한 채는

쥐들의 밥그릇

바퀴벌레들의 밥그릇

이 방을 관 삼아 누운

오래 전 죽은 자의 밥그릇

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

맵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

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

상처들의,

이 집 한 그릇

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봐

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

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눈물 많은 밥 냄새 나네

 

(아래는 김지하 시인의 시 '새봄 4'에 대한 정끝별 시인의 추임새)

또 한해가 무사히 저물었으니 고맙습니다. 새해가 되었다고 식구들끼리 둘어앉아 떡국 한 그릇 끓여 먹을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다가올 새봄에 꽃 볼 수 있으니 더욱 고맙겠습니다. 밥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해서 밥 먹고, 밥이 생명이 되고 생명이 일이 되고…… 그러니 밥이 밥을 먹고, 새봄이 새봄을 먹고, 우주가 우주를 먹고…… 조용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보면 생명이 생명을 먹고 있는 새해의 분주한 소리들, 당신이 새해입니다.

 

춘궁(春窮) / 서정주

 

보름을 굶은 아이가

산山 한 개로 낯을 가리고

바위에 앉아서

너무 높은 나무의 꽃을

밥상을 받은 듯 보고 웃으면,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 두 개로 낯을 가리고

그 소식을

구름 끝 바람에서

겸상한 양 듣고 웃고,

또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 세 개로 낯을 가리고

그 소식의 소식을 알아들었는가

인제는 다 먹고 난 아이처럼

부시시 일어서 가며 피식 웃는다.

 

식탁은 지구다 / 이문재

식탁은 지구다

중국서 자란 고추

미국 농부가 키운 콩

이란 땅에서 영근 석류

포르투갈에서 선적한 토마토

적도를 넘어온 호주산 쇠고기

식탁은 지구다

어머니 아버지

아직 젊으셨을 때

고추며 콩

석류와 토마토

모두 어디에서

나는 줄 알고 있었다

닭과 돼지도 앞마당서 잡았다

삽십여 년 전

우리 집 둥근 밥상은

우리 마을이었다

이 음식 어디서 오셨는가

식탁 위에 문명의 전부가 올라오는 지금

나는 식구들과 기도 올리지 못한다

이 먹을거리들

누가 어디서 어떻게 키웠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탓이다

뭇 생명들 올라와 있는 아침이다

문명 전부가 개입해 있는 식탁이다

식탁이 미래다

식탁에서 안심할 수 있다면

식탁에서 감사할 수 있다면

그날이 새날이다

그날부터 새날이다

 

밥이 쓰다 / 정끝별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쓴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 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