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면식도 없는 조그만 동네의 시인인 나에게
이렇게 낯설게하기의 조상격인 시집을 보내주어 아주신기하고 반갑게 보았다.
툭툭 내뱉듯 오래되고 단련된 언어들이
편편의 시마다 고양이처럼 슬그머니,
혹은 흰말처럼 다그닥거리며 다가온다.
그런데도 잇새에 자주 걸리는 봄동겉절이 속의 부추같지 않고, 토끼처럼 겅중거리며 뛰어논다.
언어의 친숙미를 거절하면서도 새롭게 반기게 하고, 일관된 주제이길 자처하면서도 딴짓하는 장난꾸러기의 눈을 가지고,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시어들의 자유분방함은 여태껏 보아온 시들의 고전적인 시야를 넓고 광활한 푸른 목초지로 달려가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런데도 제목인 < 백 년의 토끼와 흰말과 고양이>에서 백석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 떠오른것은 왜일까. 단순히 단어들의 배열방식인가 싶기도하지만 암튼 시평에서도 말했듯이 오랫동안 시를 쟁이고 만지고 써온 내공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시집이다. 앞으로 쭈욱 건안건필의 길이 꽃길이길 빈다.
시감상)
봄의 서랍
서랍 속에 쌓이는 눈 열기만 하면 되는데
바람이 들어갈 작은 틈이 벌어지기만 하면 되는데
꽃잎의 부드러운 손길 한번 스치면 되는데
소매 속으로 스미는 바람, 왜 봄이어야만 하는지 모르겠네
춘분이 난분분 서랍을 열고 있군
춘분이 눈의 서랍에 갇혀있다 봄은 너무 오래 걸린다
내가 아는 서랍은 내가 아닌 곳에 더 많다
낮의 서랍에 가두어놓은 밤, 벌의 침이 들락거리는 서랍
공중을 열고 있는 초록 서랍
아! 냄새가 진동하는군. 누군가의 서랍을 엿본다는 것
멈출 수 없는 호기심으로 미로에 갇히고 마는 불장난
난장亂場이 되어버린 서랍 속 꽃이거나 춤이거나 새이거나
알 수 없는 몸들이 줄줄이 매달려 엮여 나온다
사방이 소란스럽고 빽빽해지는 산.
밤의 서랍이 분주해지기 전 매미의 잠꼬대가 울려퍼지기 전
눈이 부신 나는 내 안의 서랍을 당기기 전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먼 산을 본다 남의 서랍이나 기웃거리다가는
햇볕에 들키기 쉽다 나는 아끼는 서랍을 밀봉해 둔다
숲의 메아리들이 반짝거린다. 거풍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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