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령의시인바람♬/[♡] 령이읽은 책

시집읽기-권순[벌의 별행본]

by 정령시인 2023. 10. 27.


나에게 독립을 할 수 있도록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은 반가운 시인에게서 간만에 연락이 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소를 알려드렸는데, 두 번 째 시집을 출간한 소식을 전하며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내 흐리멍텅한 기억에 시인의 첫 시집은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였고, 개인적인 시각으로는 조금 우울했고 고독했었다.
그런데 이번시집은 사회현상을 담았고, 시인의 직업인 어린이집 원장다운 시선으로 아이들과의 일상과 거리를 거닐며. 혹은 산책하며, 또는 여행을 다니며 보고 느끼고 사색한 것들을 시 속에 고스란히 안착시켰다.
시적인 사유가, 그리고 세심하고 꼼꼼하게 살피는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그 곳에는 살아가는 인생이 모두 담겨있다.
특히 삶을 살아가면서 늘어가는 안쓰러움과, 곁을 잃어가며 감내해야할 슬픔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정기석 문학평론가님의 해설을 잠깐 빌리면, ' 우리의 지금-여기의 끝을 오느라 잃은 것이 아닌, 여기까지 오면서 남은 것들의 시간, 그 무수한 축적과 접점들의 시간으로 보면, 끝과 시작은 조금 달리 씌어질 수 있지 않을까.'
평론가는 이 문장으로 ,  시인이 보는 꽃의 뒤를 앞으로는 정면을 바라보며 좀 더  환하고 말갛게 나아가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나의 소견이다.
시의 집을 짓는다는 작업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아이를 낳는 산통과도 같다고 한다. 권순 시인의 앞으로의 행보가 반짝이는 햇살로 가득 차오르는 날이길 바란다.


시감상)
가족사진



목소리를 잃어버린 그가 돌아왔다
신화 속에서 본 듯한 얼굴이다

민낯으로 고개 끄덕이며 웃고만 있어도
눈만 찡긋해도 속내가 드러나는
솔직한 얼굴

목소리를 내지 않는 그가 돌아왔다
알마간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입을 열지 않는 그는
성대를 잠그고 말갛게 웃고만 있다

수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바닷가 사람의 표정으로 서 있다

고막이 없는 사람처럼 헐렁하게 웃는
그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새벽에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디에 깃들어 있을까

숨어서 내는 저 소리를
자꾸만 가라앉는 저 소리를
무엇이 들어 올릴 수 있을까


국수


도화동 국수 공장 노부부는 오늘도 낡은 국수틀을 돌린다 육십 년째 골목을 깨우는 기계 소리가 헐겁다 국숫발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쪼개지고 간소한 한 끼를 거들던 바람이 다녀간다 시끄러운 세상사 빼곡한 신문지로 감싼 국수 묶음이 시렁 위에 가지런하다 기계가 스스로 멈춰서기 전에는 손을 놓을 수 없다는 할아버지 말씀이 금방 말아낸 국수 면발 같다 자식들이 한창 클 때 국수틀이 화수분 같았다고, 국수 타래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 할머니가 느릿하게 국수틀을 쓰다듬는다 도화동 국수공장에는 낡은 기계 어루만지며 먼지 낀 시계처럼 가만히 삭아 내리는 늙은 부부가 있다 집 앞을 서성이는 배고픈 사람에게 국수 한 그릇 말아내미는, 귀한 사람 알아보고 귀한 물건 보듬는 눈 밝은 어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