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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의시인바람♬/[♡] 연꽃홍수

바람이 머문 자리 /정령시집[연꽃홍수]중 72쪽

by 정령시인 2013. 6. 4.

바람이 머문 자리/정령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꽃이 핀다.거리마다 낙엽들로

머물렀던 보답을 대신하고 지금 막 일어서던 바람이 잠시

머뭇거린다. 길가의 작은 꽃들이 다음 생을 위해 씨앗과 이

별을 준비한 까닭이다. 하늬바람에 흔들거렸다면 그 씨앗마

저도 맺히지 못하고 사라질 뻔한 사실에 온몸을 부르르 떨다

이제 겨우 몸을 추스려 심장같은 씨앗을 갈바람에 내맡긴다.

보내야 함이 참기 힘든 일이 될 것이지만 눈빛 마주하지 못

하고 보내려 한다. 손끝에서 차마 떨구지 못하는 동안 바람

도 조용히 나무에 걸터앉아 기다려준다. 어젠, 오래된 소국

이와 술 한 잔으로 즐거웠던 한 때를 휘청거리며 달빛에 눈

물 몇 방울 보태고 뜨거운 포옹으로 달랬다. 꽃이 되기까지,

말발도리나 벌노랑이나 따가운 벌침을 맞아야했고, 참아왔

던 순정을 고이 바쳐 알알이 영글게 했다. 바람이 기다리다

지쳐 한숨을 날리니 매달렸던 자그만 녀석들 날아오르는 순

간이다. 어느 곳에 살든지 누구와 만나든 찡그리지 말라고

웃으며 보내려 했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눈물로 보낸 한

나절이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멎고 맞잡은 깡마른 손 내내

버석거린다. 작은 귀울림처럼 귓속에서 씨앗의 노래가 들려

온다. 버석거리던 손끝에 간질거리며 새살이 돋아난다. 바람

이 전하는 녀석들의 즐거운 소식이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잘

버티어 주더라고, 바람 고맙다고 화들짝 놀라는 시늉, 연분

홍 꽃봉오리 활짝 화알짝 편다.